▲ 오병익 충청북도교육삼락회장

외손녀가 고3이다. 네 살 적부터 서점이 단골 놀이터였다. 빨간 날짜엔 마을 도서실‧시립도서관에 처박히다시피 읽어 낸 권수를 꼽아보면 웬만한 도서실 장서 버금갈 거다. 독서는 유통 기한 전무한 평생 자산일진대, 수능에선 그게 아니다. 용납 안 될 만큼 심대하다. 그 모순이 안쓰러워 외손에게 이따금 전화 단축키를 누르지만 ‘지금 받을 수 없어 삐 소리 후…’ 다. 잠시 뒤 딸의 전화다. “아빠, 수능 두 달 남짓인데 전화는 사양한답니다.”

하기사 매번 같은 “열심히 하자” 한마디로 부담을 주려한 것 외 달리 할 말도 없었다.

자녀 성적을 높이려고 학부모가 직접 ‘선수’로 뛴다. 지방 아이들도 주말에는 부리나케 서울 대치동 학원가로 운전하는 학부모들 차에 올라야 한다. 수능을 향한 현대판 ‘맹모삼천지교’, 절박한 부모 심정은 이해되지만 되레 자녀들에게 더 큰 부담의 패착일 수 있어 애처롭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은 고등학교 교육과정 정상화와 대입 전형자료 제공이 목적인데 지난해 수능 5개월 전엔 이른바 '초고난도 문항(수업시간 스토리와 전혀 무관한)'을 출제하지 않겠다는 비상벨이 울렸었다. 왜 하필 수능 코앞에서 난리를 쳤겠나. 그 배경에는 이미 대통령의 킬러문항 배제 지시에도 불구하고 모의고사(모의평가)조차 꿈쩍 않자, 대입 담당국장은 경질됐고 ‘어머 뜨거워’를 감지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까지 물러나는 등 홍역을 치렀다.

하지만 겁주는 것만으론 흠집 낸 꼴이다.

1994년 수능 도입 후 역대 정부도 숱하게 겪은 수난사 아녔나. ‘괴짜 수능, 물 수능, 불 수능’ 대책 또한 거기서 거기였다. EBS 출제 위원이기도 한 현직고등학교 교사가 수능 관련 문제 수천 개를 대형 사교육 업체들에 판매, 2억원이 넘는 수익을 챙겨 청탁금지법 위반으로 검찰에 송치된 사건 등, 사교육을 근절하겠다며 EBS에 매달려 수험생들 늦도록 붙들어 두고 TV 화면만 지킨 ‘야간자율학습’이 대박 났던 때도 있었으니 말이다. 지문 70% 이상 방송교재를 베껴 변별력은커녕 ‘운(運)7 실(實)3’ 서막을 기억한다.

부랴부랴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논란의 핵심인 킬러 문항(공교육에서 다루지 않은) 관련 “사교육으로 내모는 근본 원인이었다. 수능 적정 난이도가 확보되도록 출제 기법을 바꾸겠다”고 되풀이했지만 학교 수업과 공교육 교과과정, ‘킬러 문항’ 정의엔 초점을 흐렸다. 암튼 사교육비 감소와 공교육 경쟁력에 미칠 더블 펀치력은 ‘노 킬러(No killer)’오해와 진실로 스러져갈 공산이 크다.

◇ 제비뽑기 대입?

우리 사회는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들고 같은 팀에서도 편 가르기가 드셀만큼 학벌의 위세는 갈수록 극렬하다. 대학 진학률은 세계 으뜸인데 월드클래스 급 인재는 드물다. 밑동은 ‘빨리빨리’에 있다. 거꾸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청주의 입시학원장과 얘기를 나눠봤다. “수능 요령과 속진 주범은 오히려 학부모”란다. AI 시대 속 출산율 최하위권, 저마다 쓰임은 다른데 100인 100색 가치는 송두리째 수능 속으로 묻혀버리지 않았나. 오죽하면 석학의 제비뽑기 처방까지 나왔겠는가. 이 역설을 이해하는 게 선결 과제다.

전국 4년제 대학 총장들의 설문조사 결과(51.8%)처럼, 차라리 수능을 자격시험 정도로 바꾸고 대학 자율에 맡겨라. 마침, 고려대는 2025학년도 수시모집에서 수험생들의 지원 기회를 확대하고 합리적 추론과 논리적 사고방식을 가진 수험생 선발 방법으로 논술성적 100%로 361명을 모집한다. 말 나온 김에 수능 증후군과 헤어질 담대한 결심을 하자. 단언컨대 비틀거리는 대입제도부터 완전히 리셋해야 우리 교육성공방정식은 그때부터 시작일 터, 어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