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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억 훈민정음 해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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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0.11  18: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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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리스트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제자로부터 진귀한 중국 책을 받는다. 역관이었던 제자 이상적(李尙迪)이 스승의 부탁을 받고 청나라 연경에서 책을 구해 온 것이었다. 당시 중국에서 책을 가져온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하는 일이었는데도 제자는 스승을 위해 위험을 감수했다.

제자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 추사는 그림 한 폭을 그려 주었다. 제자는 이 그림을 받아들고 감동했다. 대체 어떤 그림이었을까. ‘추운 겨울이 된 뒤에나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세한도(歲寒圖)였다. 제자의 의리를 ‘세한’에 비유하여 그 소회를 그린 것이다.

제자는 그림을 가슴에 품고 연경을 갔다. 그리고 추사와 편지로 경학을 논하던 당대의 석학들에게 보여주었다. 중국학자들은 추사의 그림을 보고 감탄하며 화제를 적어주었다. 불후의 명작 세한도는 이렇게 태어났으며 그 가치는 오늘날 국보(國寶) 제180호로 지정되는 영광을 얻었다.

옛날에는 책이 귀했어도 터무니없이 값을 매기지 않았다. 조선 중엽 4대 민간 도서관으로 회자되었던 진천 완위각(宛委閣)은 1만권을 수장했던 이하곤(李夏坤)의 서가였다. 그는 너무나 책을 좋아했던 것이 병이었는데 좋은 책이 있으면 옷가지를 주고 구매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선비들이 입던 옷과 책을 교환했다면 그리 높은 가격은 아니다.

그러나 가난한 선비들이 책을 수장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대개는 관청이나 혹은 장서가에게 책을 빌려 수사(手寫)한 후 돌려주곤 했다.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塞說)에서 당시 책이 귀한 시대의 풍속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전략)...판각으로 인쇄된 책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집안이 가난한 선비는 쉽게 얻을 수 없다. 관청에서 빌려 손으로 직접 써 전하는 일은 어렵고 힘들 뿐 아니라 잘못 기록하기가 쉽다. 그래서 나는 평생 동안 책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면서, 결코 손상시키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하략)” -성호사설(敬玩書籍)

한국인은 성호처럼 책을 사랑한 민족이다. 세계에서 제일먼저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다량으로 책을 간행한 역사를 지닌다. 14세기(1377AD) 고려 말 청주목 흥덕사에서 간행 된 ‘직지심체요절’은 독일 쿠덴베르크 보다 78년이 앞선 나온 금속활자본이다.

책은 비록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한국정부는 청주에 고인쇄박물관을 신축했다. 박물관 개관당시 전시 할 책이 부족하자 충북의 많은 독지가들이 앞 다투어 전적들을 무상으로 기증했다. 이 가운데는 조선 전기에 간행 된 문화재급의 귀중한 책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동안 학계에서는 문화재 기증문화가 봇물을 이룬 적이 있었다. 구석기 연구의 권위자였던 연세대 고 손보기박사의 자손들은 고인의 유지에 따라 고책 삼국유사를 본교에 기증한 적이 있다. 이 책은 지금까지 발견 된 삼국유사 중 가장 오래 된 것으로 국보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와당 수장가 류창종 변호사는 1천8백점이나 되는 소장품을 국립박물관에 무상으로 기증했다. 대구의 이태조(65)여사는 겸재(謙齎) 정선(鄭敾)의 그림 등 서화와 도자기 등 1천18점을 모교인 효성여대에 기증했다. 문화재를 값으로 따지지 않는 훌륭한 선행들이었다.

최근 국보급 훈민정음 해례본 소장자가 1천억을 주면 국가에 기증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는 뉴스가 눈길을 끈다. 이 책은 본래 소장자였던 골동상과 소유권 소송중이며 법원으로부터 반환명령까지 받았다고 한다.

1천억 운운은 황당하고 후안무치한 욕심이다. 문화재청도 1천억 요구에 난색을 표명했지만 훈민정음 해례본은 개인의 것이기 보다는 국가의 자산이다. 추사와 제자가 의리로 주고받은 책 선물고사가 새삼 그리워지는 세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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