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준 전 충청일보 편집국장

노비는 과거 봉건사회에서 천민 계급이다. ‘쌍 것들’이라 하여 업신여김을 당하고 회초리를 몸에 달며 평생 비극적 삶을 영위했다. 물건처럼 사고 팔리는 존재가 되어 이집 저집으로 전전했으며 어릴 때부터 늙어 병들 때 까지 중노동에 종사해야 했다.

주인은 노비를 살해 한 경우에만 소추 당했다. 각종 사형(私刑)을 자행해도 관아에 불려가지 않는 특권을 가졌다. 노비들은 모반죄를 제외하고는 주인을 관아에 고발 할 수 없었다. 이럴 경우 노비들은 강상(綱常)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교살형에 처해진다.

노비들이 주인들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은 이면사도 있다. 옥천군 이원면 금강가에 있는 ‘노비 헌비’의 묘소에 얽힌 사연은 스페셜한 경우다. 우암의 부친 송갑조는 어린 시절 엄마를 잃고 마침 출산 한 노비 헌비의 품에서 자랐다. 송갑조는 자라면서 노비의 자식들과 형제처럼 어울렸으며 노비를 친 엄마처럼 생각한다.

엄마가 자신의 집안 노비임을 안 어린이는 고역에 시달리는 헌비의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했다. 장성한 송갑조는 노비의 집에 들러 그녀의 자식들과 함께 식사도 했는데 그럴 때 마다 밥맛이 없어도 맛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송갑조는 노비가 죽자 강가의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노비헌비의 묘’라는 비석까지 세워졌다. 노비에 대한 양육 보은의 비석이 세워진 예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노비들은 양반가 어린 부녀자들에게도 매를 맞은 모양이다. 송갑조의 아들 우암은 딸의 출가에 앞서 계녀서를 지어 주면서 노비들을 다루는 도리를 당부한다. 부친의 인성을 닮은 탓일까. 어린 딸에게 노비들에게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세속(世俗)이 노비에게는 조그만 일에도 꾸짖고, 음식도 잘 아니 주고, 의복도 잘 아니 입히고, 대소간에 죄 있으면 형장(刑杖)을 과히 하여 사경에 가깝게 하여 위엄 있고 버릇이 엄하다...(중략) 부디 노비들을 불쌍히 여기어 꾸짖지 말고 칠 일 있어도 꾸중하여 과히 치지 말라. 사람의 재주 다 각각이니, 그 종이 못할 일은 시키지 말고, 이 종 보고 저 종 말 말고, 시가 종을 제 데리고 온 종만치 아는 이 적으니 부디 같이 하고, 종 데리고 남의 시비 말 말고, 오랜 후에 경계하여 꾸짖되 늘 꾸짖지 말고, 상을 찌푸려 나무라지 말고, 수고하는 날이거든 음식 분간하여 주고, 어린 자식이라도 불쌍히 여기고...(하략)”

성격이 까칠한 궁중의 여인들이나 양반가의 사녀들은 오만하여 곧잘 힘없는 노비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다. 악덕을 행한 연산군의 첩 장녹수나 영조의 서녀 화안옹주(和緩翁主)의 고사는 야사로 남는다. 포악한 옹주나 궁녀, 사대부 딸들의 말년은 대개 불행했다.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는 ‘땅콩회항’의 주인공 대한항공 전 부사장 사건을 보면 아직도 우리 사회에 '천민자본주의' 문화가 잔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의 공주부사장이 회사의 모든 직에서 사퇴하고 회장인 아버지까지 나서 사과했지만 국민들의 분노는 식지 않고 있다.

대한항공은 회장 딸의 사기업이 아니다. 많은 국민과 기업, 근로자들이 해외에서 피땀 흘린 대가로 커온 공기업과 같은 회사다. 기업을 사유물인양 생각하고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승무원들을 ‘천민’처럼 대해 공분을 사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이 같은 대우를 받거나 노예계약 등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재벌기업 창업자들이 고령으로 일선에서 은퇴하자 귀엽게만 자라온 2세, 3세 자녀들이 덩치 큰 기업 경영을 맡으면서 종종 문제가 발생한다. 국민들에게 사랑 받는 기업으로 지위를 지키려면 총수들의 생각부터 바뀌어야 한다. 철없는 딸이나 자식을 앉히지 말고 훌륭한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책임을 맡기는 전문경영체제를 확립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