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준 전 충청일보 편집국장

필자는 어린 시절 동네를 찾은 한 무리의 남사당패 공연 기억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농악대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신나는 음악을 연주하고 어른들의 어깨에 올라 탄 무동(舞童)은 손을 흔들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고깔을 쓴 처연한 무동들은 소녀처럼 보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어린 남아들였다고 한다.

아이들은 말이 없었고 모두 슬픈 얼굴이었다. 마을 아낙들은 곡식을 가져다주고 풍물 한마당을 흥미롭게 구경했다. 착한 시골 부녀자들의 눈에는 남사당패 무동이 된 아이들에 대한 측은함이 더 했던 모양이다.

이들은 1950년대 농악단을 구성하여 시골 마을을 돌며 연주했던 남사당패의 잔영이었다. 고막을 찌를 듯한 태평소 소리는 필자가 평생 국악을 좋아하게 된 동기가 된다. 태평소 소리는 사람을 불러 모으는 소리여서 60년대 극장에서 각종 공연을 하기 전 이를 불어 관객을 유치하기도 했다.

농악의 기원은 여러 설이 있지만 군악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우선 농악대의 전립(戰笠)과 복장이 그렇다. 군사음악대인 대취타가 지닌 악기의 모든 것이 등장한다. 진주 삼천포농악은 가락이 빠르고 상모놀음과 진법(陣法)놀이가 많아 군악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군무(群舞)가 바로 진법이며 검무도 등장하여 특별한 모습을 연출한다.

광지원 농악이나 화성 봉암 농악을 연구한 한 논문에서도 구성이 모두 조선시대 군사 진법을 수용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농악대가 모였다 흩어졌다는 하는 형태가 바로 오방진, 삼방진, 학익진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농악에 왜 이런 군사 진법의 잔영이 나타날까. 여기에는 국민 개병의식과 유사시 전쟁을 대비한 비밀이 숨어있다.

조선시대 속오군(束伍軍)은 정규 군대가 아닌 비상시 병력을 보충하는 예비부대였다. 농민들은 모두 속오군으로 전쟁이 나면 정규군대에 편성되어 지휘를 받았다. 기록을 보면 군사지휘권· 조련권 등은 지역 사령관인 영장(營將)이 장악했다고 한다. 속오군은 시골에서 편성이 의무화 된 것이므로 국가의 재정이 절감되었으며 훈련장이 마을에 있어 수시로 동원 훈련이 가능했다.

속오군 편제를 보면 대(隊)·기(旗)·초(哨)·사(司)·영(營) 등으로 상향 조직되었다고 한다. 대개 1대가 11인으로 3대가 1기, 3기가 1초, 5초가 1사, 5사가 1영이다. 1영의 총 속오군사 수는 모두 2천5백명이었다.

속오군에 편성된 농민들은 훈련시간이면 나팔소를 불고 북과 괭과리를 치며 한바탕 놀았다. 진법을 배우고 때로는 검무(劍舞)도 익혔다. 농민들은 이런 놀이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진법을 체득하고 무예를 훈련했던 것이다. 임진전쟁이후 한동안 속오군의 편성이 활성화 되고 훈련과정을 통해서 군악은 자연스럽게 민중과 일체감을 이루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자 속오군의 전력증강을 위한 훈련은 농악(農樂)으로 변화되어 휴식과 노동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민속 오락으로 변질되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전통농악으로 계승 된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9차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를 위한 정부간위원회에서 '농악'이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가 최종 결정됐다는 소식이다. 우리나라는 이번 농악의 등재 결정으로 아리랑, 김장문화 등 총 17개의 인류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한 나라가 됐다.

농악의 위세는 참여하는 사람의 수자에 따라 그 감동이 다르다. 수 백명이 등장하는 퍼포먼스를 보면 그 역동성이 장관이다. 사람들의 심장을 뛰게 하는 태평소, 긴박함을 강조하는 둥둥 북소리, 군사들의 힘찬 율동미는 일대 스펙타클을 이룬다. 비엔나 오케스트라나 런던 필하모닉도 이런 멋진 음악을 결코 연출할 수는 없다.

K팝, 판소리에 이어 농악이 세계인들의 가슴에 진한 감동을 선사할 날이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