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준 전 충청일보 편집국장

영화 ‘명량’에서 간사한 배신자로 나오는 실존인물 ‘배설(裵楔)’에 관한 시비가 요즈음 인터넷상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경주 배씨 문중에서는 영화감독과 작가등을 경찰에 고소까지 했다. 배설은 영화에서처럼 실제 이순신장군을 죽이려 하고 유일하게 남은 거북선마저 불태웠던 것인가.

우선 배설에 관해 살펴보자. 그는 본관이 성산(星山)였으며 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낸 배덕룡(裵德龍)이다. 1583년(선조16년) 별시무과에 급제,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가 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이 되었다. 조경이 황간·추풍령에서 패전하자 향병을 규합, 왜적과 대항했다. 이어 합천군수가 되었으며 부산첨사· 진주목사등을 거쳐 선산부사가 되었다. 부산첨사 시절에는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았다고 기록된다.

1597년 다시 경상우수사가 되었으며 이해 7월 8일 부산에 정박 중이던 왜적선 600여 척이 웅천을 거쳐 가덕도로 향할 때 통제사 원균의 명령을 받고 웅천을 급습해 큰 공을 세웠다. 웅천 전투는 임진해전에서 가장 많은 일본전선을 대파한 승리의 전투였으나 빛바랜 평가를 받고 있다.

배설은 그 후 원균 주도의 칠천해전(漆川海戰)에서 전세가 불리함을 파악하고 부하들과 퇴각할 것을 모의한다. 7월 16일 적의 대 전단이 공격해오자 10여척의 왜선을 대파시키고 12척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 1천여명의 군사들을 구했다.

이순신장군이 전라수영으로 돌아왔을 때 배설은 12척을 장군에게 인계했다. 여기서 영웅과 배신자라는 운명이 갈리고 말았다. 이장군은 12척의 배를 가지고 130여척의 일본 전선을 격파하여 영웅이 되지만 배설은 전투를 피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도망자라는 역사의 죄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배설이 전선을 보전하여 이순신장군에게 귀속시키지 않았다면 명량승리도 없었으며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고향으로 돌아간 배설은 이순신장군의 탈영보고로 체포되어 참수된다. 그런데 임진전쟁이 끝나고 유공자를 포상할 때 배설은 선무원종공신 1등에 봉해지며 병조판서로 추증됐다. 이순신장군에게 선무(宣武)1등공신과 좌의정을 추증한 것을 감안하면 그 다음의 공훈이다. 선조는 배설이 큰 공로가 있음을 인정하고 억울하게 죽은 한을 풀어준 것이다.

웅천 전투나 친천량 해전에서 보듯 배설은 무인으로 상당한 전략가로 평가 된다. 난중일기를 보면 임금이 내려 보낸 전투명령의 교지에도 배설이 불만을 토로한 것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배설은 칠천 전투의 트라우마로 고민했을 게 분명하다. 그는 명량에서의 일본전선과 조우도 무모한 싸움으로 판단했다. 당시 해전에 참가한 여러 장수가 그랬듯이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 찼을 게다.

배설은 병 치료를 이유로 이장군의 허락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실제 칠천량 해전에서 입은 부상을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될 몸 상태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장군은 배설의 휴가를 허락 한 이틀 만에 탈영 보고를 했다. 배설에 이어 휴가를 사칭하며 명량 해전을 회피하려는 다른 군사들의 이탈 방지를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청산(靑山)아, 됴히 있던다 / 녹수(綠水)가 다 반갑다 / 무정(無情)한 산수(山水)도 이다지 반갑거든 / 유정(有情)한 님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 엊그제 언제런지 이리로 져리 갈제 / 월파정(月波亭) 발근 달애 뉘 술을 먹던게고 / 진강(鎭江)의 휘둔 버들이 어제런가 하여라.”

이 시조는 배설이 남긴 유일한 시가다. 전쟁에 지친 몸으로 고향에 돌아와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 그 정한을 읊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인간 배설은 문무를 겸한 인품으로 이 장군을 암살하고 거북선을 불태운 파렴치한 배신자는 진정 아니었다.

픽션의 대명사라고 일컬어지는 영화라 해도 역사적 인물에 관한 것은 사실을 토대로 해야 한다. 헐리웃에서는 사극일 경우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묘사할 때 기록과 사실을 매우 중요시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드라마나 영화들이 사실을 왜곡하여 종종 문제가 불거진 사례가 많다.

명량에서도 작가나 감독이 ‘장군 배설’에 관한 기록과 사실을 조금만 살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제작자들이 ‘픽션으로 봐 달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하지만 말고 후손들의 상심을 어루만져주는 아량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