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준 전 충청일보 편집국장

생전의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사원 수련회 때 직원들과 씨름을 즐겼다. 그는 69세에 신입사원과 겨루다가 갈비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일설에는 정회장이 젊은 시절 선수로 참가한 씨름판이 있었다고 한다. 강원도 벽촌 출신 쌀장수의 소망은 씨름왕이 되어 황소를 타는 것이었다.

미국 GE회사를 방문했던 정회장이 잭 웰치 회장을 만나 의견이 엇갈리자 씨름은 못하고 팔씨름을 제의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잭 웰치회장을 팔씨름으로 이기고 GE와 합작 투자 법인을 일궈내기도 했다.
씨름은 우리 고유의 전통 민속놀이다. 4월 초파일, 5월 단오, 7월 백중과 8월 추석 등 축일이면 어디서나 씨름 한마당이 열렸다. 이날이면 규방에서 몸을 숨긴 사녀(士女)들도 장옷을 쓰고 나들이가 가능했고 건장한 사내들의 건각을 훔쳐볼 수 있었다.

5세기경 축조된 고구려 고분(角抵塚) 벽화에 씨름하는 역사들이 등장한 것을 보면 역사는 천 수백년이 넘는 것 같다. 그리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도 씨름에 관한 기록이 자주 나타난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보면 고려 현종(顯宗) 때 무예청(武藝廳)에서 ‘각저’를 무과시험 종목에 포함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충숙왕(忠肅王)은 격구와 씨름을 즐긴 스포츠 매니아 였다. 고려사에 보면 정사는 돌보지 않고 매일 근신들과 격구, 씨름에 열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충혜왕(忠惠王)은 개경 시내의 누(樓)에 나가 격구(擊毬), 씨름놀이를 구경했으며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우승자에게는 상을 내리기도 했다.

조선 인조 때 봉림대군이 볼모로 선양(瀋陽)에 갔을 때 호위 무사였던 김여준(金汝峻)은 힘이 장사였다. 우거(禹巨)라는 청나라 장수가 김여준을 보고 농으로 씨름 대결을 청했다. 그런데 이 씨름에서 우거가 죽고 말았다. 그러나 청나라는 정당한 시합이라 하여 김여준을 처벌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에는 조선 시대 한양도성의 씨름 풍속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청년들이 남산의 왜장(倭場)과 북악(北嶽)의 신무문(神武門.경복궁의 북문) 뒤에서 씨름을 하며 승부를 겨룬다. 그 방법은 두 젊은이가 서로 허리를 구부리고 각기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허리를 잡고, 또 왼손으로는 상대방의 허벅지에 끼운 샅바를 잡고 일어나서 상대방을 번쩍 들거나 혹은 다리를 걸어 메어치는 것으로, 이때 깔리는 사람이 지는 것이다”

조선후기의 화가 단원(檀園) 김홍도는 씨름판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그려 남겼다. 빙 둘러앉은 인파 속에 두 젊은이들이 씨름경기와 택견 대련을 하고 있다. 샅바를 잡고 힘을 쓰며 들어 올리는 사람과 곧 넘어지려는 사람의 표정에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인파속에는 엿판을 맨 행상도 있어 당시 풍속을 말해 주고 있다.

한때 인기 스포츠 선두를 달렸던 민속씨름이 요즈음 풀이 죽었다. 야구나 축구등 인기 구기에 눌려 이만기, 이준희, 강호동시대의 영광이 전설처럼 됐다. 백두, 천하장사 우승자의 상금이 다른 구기 종목 챔피언에 비해 훨씬 작아 초라한 모습이다. 이러고서 어느 젊은이가 씨름장사가 되겠다고 하겠는가.

얼마 전 국회에서 있은 ‘씨름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방안’ 포럼에서 대한씨름협회 회장의 조크에 여당대표가 얼굴을 붉히고 자리를 떠난 일이 화제가 된바 있다. 모처럼 씨름중흥을 위한 진지한 국회 포럼장을 만들지 못한 주최 측도 문제였지만 조크로 받아들이지 못한 여당대표도 속이 좁다.

중국은 아리랑에 이어 씨름도 국가중요문화재로 등록을 했다. 우리의 민속씨름을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유네스코 등재 추진이 시급해 진 것이다. 국민들은 지도자들이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기에 앞서 허심탄회하게 협력하는 모습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