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병익 前 단재교육연수원장

두고 두고 가슴에서 커가는 /아버지 말씀을 듣고 싶다 /“너도 어른되어 아빠하면 알지” /말이 그렇지 팔남매 손 벌려 다가설 때마다 /차츰 휘어지신 등허리 /어미소 큰 눈 망울, 새끼 날 달 채워가면 /아버지 말씀도 덩달아 부자 /필자의 시‘아버지 말씀 전문이다.

우렁이 새끼처럼 우리팔남매는 조금씩 어머니 아버지를 파먹으며 자랐다. 무거운 짐을 잠시도 벗지 못한 채 어머니는 한웅큼씩 털어 넣는 약에 의지한 절반의 세월로 거슬렀다. 그렇게 떠나야할 길이 바쁘셨는지 삶을 마무리하는 말씀 한마디를 남기지 않으신 채, 저 세상을 향한 고운 화장이 먼저였다. 언제나 후렴같은 자식걱정, 한가위 앞에서야 살아오른다. 생전에 어려움을 고해할 곳이 없다면서 유심히 딸에겐 전화통화가 길었던 일도 이제야 짐작한다. ‘진정,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팔남매가 오늘과 같이 제발로 세상을 디딜수 있었을까?’ 어림 반분어치도 불가능할 일이다. 때로는 팔남매의 어거지 떼에 더욱 속병이 도지셨을 거다.

기쁨보다는 근심을 달고 산 부모님의 가파른 언덕길, 그러나 힘든 표정 한 번 볼 수 없었다 . 영원한 그리움인 부모님 일기. 하나 둘 기억을 꺼내며 이제 애닳도록 태운 발자욱을 더듬어 살아있는 강으로 흐른다. 아주 이따금 우리가 보낸 편지를 챙겨 읽으신 청순함처럼, 부모님 세상이 늘 생전 같았으면 좋겠다.

올해는 유난히 일찍 찾아 온 무더위와 극한상황의 가뭄까지 용케도 이겨낸 한가위 들판은 생각보다 풍요로운채 황금 색깔로 채색하고 있지만. 나에겐 여러 해 전부터 부모님을 산소에서나 뵈어야 하는 읊조림은 이번 명절도 휑한 불효가 된다. 고등학교 3학년, 입시준비로 한창 정독반을 달굴 때 이승을 등뒤로 하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언제나 풍부하셨던 유머부터 떠올린다. 슬하에 8남매를 두신 부모님은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추석명절은 제례와 성묘 그리고 형제간 소통과 가풍을 빈틈없이 익히게 하셨다.

◇‘살아 생전’의 교훈

다섯 째 아들인 내가 읍내중학교 입학시험 합격을 알리는 방이 학교건물 벽에 붙던 날, 아버지는 나보다 먼저 합격번호를 찾아내시고 당신의 따스한 등에 업은 채 세상을 다 얻으신 양 으시대셨다. 3년이 지난 뒤 다시 고등학교를 시험으로 합격했을 때는 빚갚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처음 업어 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아버지 몸무게가 예상보다 너무 가벼우셨다.

시련은 견딜만큼 온다고 했던가? 지금 생각하니 그때부터 몹쓸 병이 아버지 몸속에서 커졌을 거라는 안타까움으로 목부터 메어온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내외분은 평생 말다툼 한번 없는 무풍의 삶이셨다. 추석 전날이면 팔남매는 보름달처럼 빙둘러 앉아 송편을 빚었다. 크기와 모양도 제각각이어서 솔잎을 깔아 쪄낸 뒤 웃음은 명절내내 이어졌다. 아무 막힘없는 부모님에 대한 공간은 무한의 은혜로 살아 시도 때도 없이 넘나든다.

생각할수록 자애로움으로 아련한 젖 냄새가 묻어남을 어쩌랴. 겨우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죽는 소리가 멎을 날 없는 우리 내외 앞에 이제야 아버지 어머니의 남다른 사랑을 남루한 모자이크로 그려낸다. 자식 입으로 들어가는 기쁨을 행복 중 으뜸으로 꼽는 우리네 부모님처럼 귀하고 향기로운 일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이번 명절은 연휴가 닷새나 이어지니 시간, 교통, 자식 핑계로 피붙이의 기다림을 외면해선 안된다. 명절 풍습이 아무리 변해도 향수마저 쇠잔할 순 없잖은가? 이번 한가위엔 ‘살아 생전 일배주(一杯酒)’로 부모님과 형제 곁에서 희망을 노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