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경험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사람이지만 사람을 완성시키는 건 책이다. /‘여보! 이것 좀 읽어줘요.’ /화장대를 돌아 /주방 숱가락 통까지 뒤져도 /안경 못 찾은 아내에게 /자존심 내려놓는 소릴 듣는다. /‘여보 안 들려, 너무 작아요.’ /라디오 볼륨을 자꾸자꾸 올리자니 /이제 /내 손이 떨린다. /‘정신 차리세요. 그건 라디오가 아니라 가스밸브…’ /어느 새 /땀으로 범벅됐다. 아내도 나도 /필자가 여러 해 전, 모 잡지사 청탁을 받아 발표한 ‘세월 그리기’ 전문이다.

이 시를 글자한자 고치지 않고 초등학교 3학년짜리 딸은 방학숙제로 베껴냈다. 도용한 내용치고는 너무 황당했다. 하필이면 노부부의 가녀린 황혼을 찜했을까? 나중에 알았으나 ‘글 도둑은 나쁜 도적질과 다르다’며 웃어넘기고 말았다. 그 사건 이후 황제노역 유사하게 글짓기 대회마다 단골로 참가하여 전국단위 대상까지 누렸으니 글 도둑만은 면책 사유임이 분명하다.  ‘그럴 줄 알았으면 딸 아이의 진로를 정치 쪽으로 권유할 걸’ 때늦은 후회다.

후보의 명시적 신호인 출판기념회를 두고 뒷이야기가 무성하다. 글 한 번 제대로 쓴 적 없는 사람까지 벼락치기하다 보니 표절, 대필, 재탕이란 어색한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걸 가리켜 ‘책을 써서 여는 출판기념회가 아니라 출판 기념회를 열기 위해 책을 낸다’는 화살 여론이다. 몇 줄 편지조차 이모티콘을 찍어 대신하는 변화시대에 책 한 권의 출산은 생명을 탄생하는 고통과 비유된다. 그러나 책에 담긴 내용보다 행사 참여 인원과 중량감 있는 인사의 영향력을 곤두세운다. 대부분 겉장만 훑고 팽개쳐진 경우 저자에겐 미안할 뿐 쓰릴 속이 안타깝다.

3년 전, 출판기념회를 생략한 도서 가운데 ‘발소리가 큰 아이들’은 우리지역 대안학교인 양업고등학교 교장시절 윤병훈 신부가 꼴찌들의 통쾌한 반란을 여과없이 쓴 인성교육 기록서다. 일어날 사안에 대하여 정확히 예언할 수 없는 게 아이들 세계이니 곧 내 이야기가 되어 지금까지 나의 최다독 목록으로 274쪽 짜리를 무려 여덟 번 정독했다. 읽을 때마다 부끄러움과 깨달음에 오히려 쩔쩔맨다. 그는 포스코상으로 받은 2억원 전액을 몸담고 있던 학교에 기부하여 학교 부지를 넓혔다. 학생 하나하나 발자국 소리를 감별, 해결사가 되는 아름다운 사랑을 교직관과 성직관의 부활로 포갠다.

◇시민 모두의 책 펴내기

‘청주시민․청원군민 1인1책 펴내기’가 8년 째다. 자서전, 가족사, 여행기, 서간집, 향토자료, 문예창작을 중심으로 나만의 소중한 책 갖기를 권장하는 방향에서 한 해 평균 150명에게 출판비를 지원해 왔다.  ‘그 땐 왜 몰랐을까?, 봄의 수다, 내 인생 받아쓰기’ 등, 기성작가를 뺨칠 제목과 사람 냄새 가득한 내용들로 초등학교 어린이부터 팔순 넘은 노파까지 단행본을 만들어 합동 출판기념회와 책 전시회를 연다. 축하라야 글을 쓴 사람들 단체사진 찍기가 전부지만 문화시민으로 진입에 자긍심은 하늘을 찌른다.
 
어머니 상여를 잡고 기절하다 일어서 저승으로 보낼 편지를 계속 쓴 사례, 두 아이를 입양하여 가족을 꾸려 세상과 부딪히는 일상이야기, 논두렁에서 메뚜기 잡고 골목을 누벼 그을리던 추억의 새김질을 시심으로 키웠다는 경험까지 다양하게 묻어있다. 자신이 출판해낸 책 앞에서 조차 수줍은 아마추어 작가들마다 심안의 그윽한 사유가 비쳐진다. 유독, 선거철에 홍수를 이루는 출판기념회, 책 축에도 끼지 못하는 하루살이가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