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 이방원(太宗)에 의해 타살된 개국공신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요즈음 삼봉을 주인공으로 다룬 드라마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방송극을 많이 쓰신 원로 작가 한분의 최근 모 신문과 인터뷰를 했는데 ‘삼봉은 줄을 잘못 서 타살됐다’는 내용이 눈길을 끈다. 삼봉은 정말 줄을 잘못서 비명에 간 것일까.

과격한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이기 전 이미 부하를 시켜 고려왕조 마지막 보루 정몽주마저 쇠도리깨로 타살한 전력이 있었다. 이런 방원을 이성계는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속으로 미워했다고 한다. 이성계는 방원이 포은을 선죽교에서 죽였다는 소식을 듣자 “나라의 원로 대신을 함부로 죽이면 되겠는가?”하고 꾸짖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첫째 부인 한씨(신의왕후)의 둘째 아들이다. 그런데 한씨는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로 맞이한 부인이 신덕왕후로 여기에서 비극의 씨앗인 방번, 방석등 형제가 연년생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태조의 총애가 신덕왕후에 쏠린다. 두 사람은 금슬이 좋았으며 그녀의 소생에 대한 태조의 사랑도 지극했다. 삼봉은 적자 방원보다 신덕왕후의 소생인 방석을 태자로 삼자는 그룹의 선두로 나선다.

삼봉은 어떤 인물인가. 그의 아호 삼봉은 도담삼봉(島潭三峰)에 연유한다고 해서 충북사람들에게는 매우 친밀하게 느껴진다. 경상도 봉화에 살던 삼봉의 부친이 단양 도담삼봉에 놀러왔다가 주막집에서 아리따운 처녀를 만나 정분으로 낳은 아이가 정도전이라는 설화가 내려온다.

기록에는 22살 때 충주사록(忠州司祿)에 임명되면서 벼슬길에 나선다. 고려의 운명이 기울던 즈음, 삼봉은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전라도 나주 회진현으로 유배됐다.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백성들과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에 정진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늙은 농부를 만난다. 농부는 삼봉을 만나자 관리들의 행태에 거품을 물었다.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고통에는 전혀 관심들이 없소. 시정의 득실과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니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는 것이 아니요?”

정도전은 노인의 질책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기록은 삼봉이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알고 ‘위민(爲民)’이 무엇인가를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방원이 강력한 왕권을 지향했다면 삼봉은 신하의 말발이 서는 균형적인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여기서 두 사람의 숙명적 충돌이 빚어진 것이다. 삼봉이 생각한 후계 임금의 풍모는 폭력적이며 마키야벨리식 사고를 지닌 이방원이 아니었다. 그는 성품이 온화한 방석을 제왕으로 지지한 것이다.

그가 기회주의자였고 소신이 없는 학자요, 정치가였다면 이방원의 대열에 줄을 섰을 게다. 여기서 삼봉의 용기와 대쪽 같은 정신 어떻게 보면 고집을 읽을 수 있다. 줄을 잘못 선 것이 아니라 나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소신 있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반원(反元)등 강한 민족의식을 가졌던 삼봉은 조선 개국 후에는 명나라에 대항하며 요동정벌의 큰 뜻을 품기도 했다. 명나라 황제는 삼봉을 잡아다 죽이려고 몇 번이고 칙명을 내렸으나 그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것이 또 필자가 삼봉을 큰 인물로 지지하는 점이기도 하다.

삼봉의 업적은 개국 초 법령의 근간인 ‘조선경국전’의 완성도 있지만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 신축과 한양 도성의 건설이었다. 정궁을 비롯한 동서남북의 성문, 한성부 5부 52방 이름을 지었는데 모두 유교 덕목이 담긴 의미를 부여했다. 삼봉이 꿈꾸던 유교적 이상향이 도성 안 이름 속에는 투영됐다고 한다.

삼봉이 죽은 후 6백여년 동안 어느 선비도 감히 정도전을 논하지 못했다. 조선말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삼봉에 대한 공론이 시작돼 벼슬이 복권되고 문헌(文獻)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삼봉과 같은 소신과 덕목을 지닌 정치가가 우리 주변엔 얼마나 있을까. 삼봉의 회고를 통해 ‘진정한 위민’의 길을 걷는 소신 있는 정치인이 많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