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끝머리에 다다른 노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거리를 가득 채웠던 선동적인 혁명의 노래는 더 들리지 않았다. 젊은이들의 속사포처럼 빠른 랩이 가난이 숨 쉬는 듯한 골목길을 점령하고 있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도착한 방. 따사로운 햇살이 궁핍한 방안을 비추자, 노인은 라디오를 켜며 흘러나오는 재즈음악에 맞춰 회상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쿠바 재즈 음악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치코와 리타'의 오프닝이다. 어디서 인가 많이 본 듯하다. 그렇다. 이 영화는 기시감(旣視感)이 넘치는 이야기, 익숙한 구성으로 오롯이 93분을 달려가는 작품이다.

그러나 진부함으로 가득 찼을지라도 끝내는 관객의 마음에 무언가 하나쯤은 남길 법한 애니메이션이다. '아름다운 시절'(1992)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페르난도 트루에바 감독은 음악의 리듬을 타고 수십 년간 이어지는 인연의 복잡한 실타래를 고전적인 방식으로 정직하게 풀어놓았다.

1948년 쿠바의 아바나. 천재 피아니스트 치코는 별빛이 찬란한 어느 밤, 클럽에서 베사메 무초를 부르는 한 여가수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녀의 이름은 리타. 여자 마음을 훔치는데 득도한 바람둥이 치코는 그날 밤 리타와 사랑을 나누지만, 새벽이슬을 맞고 치코의 집을 찾아온 여자 친구 때문에 그들은 다툼 끝에 헤어진다.

그러나 단 하룻밤의 풋사랑이 놓아준 인연의 골이 그렇게 깊을 줄 둘은 예상이나 했었을까. 사랑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치코와 리타는 헤어짐과 만남을 끝없이 반복하지만, 리타가 뉴욕으로 떠나면서 둘의 사랑은 종지부를 찍는다.

그렇게 수년이 흐른 어느 날. 뉴욕서 활동하는 선배 음악가를 찾아 미국을 방문한 치코는 이미 스타가 된 리타와 우연히 마주친다.

영화는 반세기가 넘는 남녀의 인연을 1시간 반에 압축한다. 영화의 드라마는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흥미를 유발한다. 여기에 관객들의 감정을 더욱 건드리는 건 애잔한 음악이다. 쿠바 출신의 유명 재즈피아니스트 베보 발데스의 연주가 마음속으로 조용히 스며든다.

비밥의 전성기였던 1940-1950년대 뉴욕의 재즈바를 배경으로 한 영화답게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등 전설적인 비밥 뮤지션의 음악도 들어볼 수 있다.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는 이야기도 안타까움을 안겨준다.

특히 클로징에서 나오는 리타의 마지막 대사는 유치할 수도 있지만 반세기의 역사가, 아니 두 사람의 인생이 담겼다는 점에서 가슴을 두드릴만하다.

전혀 다른 내용이지만 '첨밀밀'이나 '카사블랑카' 같은 고전적인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는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를 즐기면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올해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경쟁부문 대상 수상작이다.

1월5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