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수근(金壽根) 선생은 한창 일할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한국의 대표적 건축가였다. 선생은 1986년 55세의 나이로 국립청주박물관을 유작으로 남긴 채 영면한다. 그는 천재 건축가이면서 심미안 있는 예술가였고 한국의 멋을 아는 멋쟁이였다.

선생은 서울대생으로 재학 중 6.25 전쟁이 발발, 부산 피난 중 일본으로 밀항한다. 그리고 동경대 건축학부에 입학 박사과정까지 밟았다. 그리고 명문가의 따님과 결혼했으며 60년도에 귀국, 김수근 건축연구소를 개업한다. 이즈음 그는 홍익대 건축과 교수를 겸직하기도 했다.

선생은 67년도에 부여에 세워질 박물관 설계를 맡았다. 그런데 건물을 지으면서 왜색조(倭色調) 시비가 들끓었는데 많은 건축가 혹은 역사학자들이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그들은 부여박물관의 입구와 본 건물의 지붕이 일본의 신사(神社)를 모작했다고 꼬집었다.

필자는 일본에서 수학한 건축학도의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백제유적이 많은 나라(奈良), 오사까(大板) 등지를 돌아본 후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일본 고건축의 원류는 백제의 것이며 일본에서만이 옛 백제건축물의 원형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왜색조 시비이후 더욱 한국적 건축물에 대한 연구에 힘쓰게 된다.

필자와의 첫 대면은 80년대 초 국립청주박물관이 인연이 됐다. 박물관 설계를 맡은 선생은 명암약수터 방문길에 당시 문화부장이었던 필자와 인사를 나눈 후 함께 보은 선씨 고가를 답사한다. 선씨 고가의 이모저모를 둘러 본 선생은 매우 만족해하며 중요한 건축물이므로 민속자료로 지정할 뜻을 비치기도 했다.

그 후 필자는 김수근 건축연구소가 있는 서울 원서동 공간(空間.SPACE)) 사옥을 자주 방문했다. 당시 공간에는 선생과 친분이 깊었던 원로 언론인 홍종인, 최순우국립박물관장, 진홍섭이화여대박물관장, 최영희국사편찬위원장 등 한국의 대표적 학자들이 자주 모였다. 그중 홍종인선생은 거의 출근하다시피 나와 커피를 마시고 돌아갔다. 그런데 이들 원로 학자분들은 지금 모두 유명을 달리하셨다.

필자는 이 시기 ‘월간 공간’에 ‘한국의 폐사(廢寺)’라는 절터답사기를 연재할 기회를 얻었다. 그것은 선생이 필자에게 특별히 배려한 것이었다. 당시는 매월 지급되는 원고료도 적지 않아 전국의 절터를 답사하는 출장비로 충분했다.

편집장은 처음 5회 정도 연재할 계획이었으나 선생은 학계의 반응이 좋아지자 더 연재를 늘리라고 지시했다. 어떻게 쓰다 보니 2년을 넘게 연재하게 됐으며 27편이상이 되는 보고서가 됐다. 이것이 기회가 되어 필자는 충북은 물론 충남도,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의 폐사지 까지 답사할 수 있었다.

선생은 원서동 검은 벽돌로 지어진 공간사옥에서 많은 문화마당을 열었다. 판소리, 병신춤은 물론 굿판까지 벌였다. 한국적인 것이라면 모두 판을 벌여 주었다. 인간문화재 고 공옥진 선생을 위시 그늘에서 살던 많은 무형문화재 전수자들이 발굴된 것은 선생의 큰 업적이다.

선생은 건축가로서 국립 청주박물관 설계를 통해 영주 부석사의 장엄한 석축미(石築미)를 재현한다. 청주박물관은 지금 명(名) 건축물로 널리 회자되고 있으며 한국의 전통적 조형미가 잘 살려진 유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건축업계의 불황으로 공간이 부도나고 또 선생의 영혼이 살아 숨 쉬는 사옥도 경매에 붙여지게 됐다. 사옥이 헐릴 위기에 놓이자 많은 문화 인사들의 아쉬워했다. 선생에게 여러 번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필자는 마음만 앞섰지 추모 기념사업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큰 빚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공간사옥이 뜻있는 인사에 낙찰돼 헐리지 않게 되고 문화재로 등록됐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 왔다. 공간사옥이 살아난 다행함이 어찌 지하의 고 김선생 뿐이겠는가. 80년대 공간을 사랑한 많은 학자, 문화인들이 모두 기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선생의 멋진 미소와 열정,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가 새삼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