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는 수양대군 때 몰래 궁을 빠져나와 사창가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 기생을 품고 잠을 자는데 갑자기 쿵하는 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기생의 기둥서방(妓夫)이 들이 닥친 것이었다.

잡히면 개망신을 당하고 목숨까지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위기에 처한 대군은 발로 벽을 박차고 구멍이 뚫리자 도망치기 시작했다. 기부는 세조를 쫓아왔지만 결국 잡지는 못했다. 이 일화를 보면 당시에도 퇴기들이 양반집 자제를 꾀어 잠을 자고 기부를 시켜 돈을 뜯어내는 ‘꽃뱀’의 원조 풍속이 만연했던 것 같다.

기부란 본래 기생에 붙어사는 한량들로 관아의 별감(別監)이나 포교(捕校)들이었다. 이들이 기생들을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기생하며 때로는 순진했던 양반자제나 부자들을 골려주기도 했다. 이들 ‘기부’ 풍속의 잔영은 한말과 일본식민시대를 거쳐 지금도 사창가나 유흥가에 남아있다.

고전 배비장전에 나오는 요염한 제주 기생 애랑도 조선 꽃뱀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그녀가 정비장과 이별하면서 뜯어내는 재물이 상당하다. 정비장은 애랑이 요구하는 대로 생명과도 같은 칼과 단벌 두루마기마저 벗어준다. 애랑은 정비장을 홀딱 벗긴 후에는 생 이빨까지 뽑아달라고 억지 눈물까지 보였다. 자신을 거쳐 간 남자를 상대로 컬렉션한 생 이빨은 무려 한 자루나 되었다.

“(전략)...정비장 이 말을 듣고 양피 갓 두루마기 활활 벗어 애랑에게 주며 말했다. ‘내 이 옷 너를 벗어주고 가니 깔고 덮고 베고 잘 제 부디 나를 잊지 말라.’ 애랑이 이번에는 정비장이 차고 있던 칼도 달라 하니 정비장 망설이다 마지못해 그것마저 풀어준다....애랑이 눈물을 뿌리며 다시 말한다. ‘어금니 하나를 빼어주시면 손수건에 싸고 싸서 백옥함에 넣어두고.. 임의 얼굴보고 싶은 생각나면 종종 내어 설움 풀고 .....’하니 정비장이 대혹하여 공방고자에게 장돌이 집게 대령하라 이르고는 이까지 하나 빼어주며 탄식했다.(하략)...”

조선 숙종대 이상(李翔)이란 인물은 꽃뱀을 이용하여 남의 땅을 빼앗은 간교한 인물로 기록된다. 천안 출신인 그는 젊은 여종을 시켜 토지 주인과 정을 통하게 했다. 그런 다음 “사통한 사실을 폭로· 고발 하겠다”고 협박했다. 땅주인은 관아에 끌려가 고문을 받을까 두려워 이상에게 땅 문서를 넘겼다는 것이다. 요즈음 꽃뱀을 이용한 공갈 사건을 방불케 하는 일화다.

중국의 고대 문헌에 꽃뱀을 지칭하는 ‘미인국(美人局)’이란 단어가 있다. 전래되어오는 민담, 설화 등에도 보이며 명나라 시대에 창작됐다고 하는 금병매, 홍루몽 등의 이름 있는 소설에도 등장한다. 원나라 시대에는 기생을 첩으로 가장시켜 소년 등을 속이는 범죄의 명칭으로 ‘미인국’이 쓰여 졌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쯔쯔모타세(つつもたせ. 美人局)’라는 말이 옛날부터 전해내려 온다. 내연의 남녀나 부부가 공모,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고, 현장을 덮쳐 금품을 갈취하는 일이다. 아마 중세 원나라를 다녀온 이들에 의해 도입되어 유행돼온 것이 아닐까. 임진전쟁이 끝난 17세기 에도(江戶)시대에 만들어진 풍류담(風流譚)에도 ‘쯔쯔모타세’가 회자됐다고 한다.

충북에서 `백화점식 꽃뱀 공갈단` 17명이 검거됐다는 보도가 있다. 피해를 입은 사람만도 500여명이나 되며 금액은 총14억여원이나 된다. 이들 꽃뱀 일당은 기업형 범죄조직으로 젊은 여성이 음란 화상채팅을 유도한 뒤 남성의 나체사진을 녹화, 지인들에게 보내겠다고 협박해 금품을 뜯었다.

선량한 사람들이 꽃뱀의 마수에 걸려 패가망신한 경우가 많다. 인기인이나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신분의 사람들이 주로 타킷이 된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기인들의 성폭행 사건이 결국 꽃뱀 사건으로 결론이 난 사례가 많다. 그러나 정작 당한 장본인들이 입는 피해는 너무나 크다.

경찰청 공식 블로그 ‘폴인러브’에 올라온 ‘아름답지만, 물리면 치명적인 그녀의 이름은 꽃뱀’이란 제목의 글이 새삼 기억난다. ‘꽃뱀 천국 대한민국’의 불명예도 사라져야 할 악풍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