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기 황진이는 콧대 높은 남자를 유혹 할 때 술을 들고 갔다. 천하의 유학자 화담 서경덕의 초막을 방문했을 때도 술을 걸러 가지고 간다. 남녀 합환에는 아무래도 술이 있어야 하고 감흥 있는 시를 주고받으려면 취기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러나 천성 선비였던 화담은 술에 취해 절세 미녀의 농염한 자태를 가까이 두고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황진이는 생애에 여러 남자를 사랑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진짜 마음을 둔 남자는 판서 소세양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소판서와 헤어질 때도 밤새 술을 마셔댔다.

-..(전략)..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人醉酒千觴)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流水和琴冷)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梅花入笛香)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明朝相別後)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情與碧波長)-

그러면 황진이가 밤새 마신 술은 어떤 것이었을까. 맑은 청주였을까 아니면 소주처럼 독한 술이었을까. 당시 개경에는 예전부터 북방에서 전래 됐다는 소주(燒酒)가 명주로 자리 잡았다. 약 9백년 전 고려 개경을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도 고려인의 음주 풍류를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술이 독하여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 서민들은 좋은 술을 얻기 어려워 맛이 흘고 빛깔이 짙은 것을 마신다”

50도가 넘는 바이주(白酒)를 즐겨온 송나라 사신이 독하지만 뒤끝이 깨끗하다고 평했으니 과연 어떤 술이었을까. 도수가 약한 막걸리나 청주(淸酒)를 지칭하지 않았을 것을 감안하면 우리의 전통주 ‘과하주(過夏酒)’를 떠 올림직하다.

과화주는 소주에다 약주를 섞은 소위 짬뽕 술이다. 무더운 여름을 탈 없이 날 수 있는 술이라는 뜻에서 얻은 이름이다. 두 개의 술을 섞어 도수를 한껏 올렸으니 이 술이야말로 폭탄주의 원류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게다. 황진이가 화담의 초막을 방문한 시기가 한 여름이었으니 과화주를 잘 걸러 가는 허리춤에 차고 간 것은 아니었는지.

평양감사의 대동강 선유(船遊) 풍류를 담은 고전 삼선기(三仙記)에 등장하는 조선시대 유명 술에도 과화주가 빠지지 않는다. ‘백하주, 이강주, 감로주, 삼해주, 이화주, 청감주, 부의주, 향은주와 약산춘, 호산춘, 노산춘, 과화주...’ 전국에서 올라 온 명주들이 즐비했지만 한량들과 기생들은 밋밋한 술 보다는 아무래도 독한 술을 기호하지 않았을까.

조선시대 또 하나의 폭탄주는 막걸리에 소주의 일종인 자홍주를 섞은 것. 즉 따뜻하게 데운 막걸리에 자홍주(紫紅酒)를 부어 빨간 소주가 떠오를 때 들이키는 것이다. 자홍주는 한약재인 지초(芝草)를 넣어 만든 서해 진도의 진곡 수주인 홍주(紅酒)와 비슷한 종류로 생각된다.

요즈음 폭탄음주문화가 사회 저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과화주나 자홍주를 즐긴 연면한 DNA가 재현 된 것인가. 젊은 여성 주당들 사이에도 소주에 맥주를 섞어 마시는 소위 ‘소맥’이 만연하고 있다. 그런데 요즈음의 소맥은 예전의 순곡주로 만드는 과화주나 자홍주와의 품격과는 다르다. 미국에서 잠시 고국을 방문한 유명 의사는 모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폭탄주야 말로 자살행위’라는 전문적인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술은 기분 좋게 적당히 마셔야 약이 된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주도(酒道)에 ‘일불(一不), 삼소(三少), 오의(五宜), 칠과(七過)’라는 말이 있다. 한잔 술로는 끝나지 않으며 석잔 가지고는 부족하고, 다섯 잔이라야 적당하다. 그러나 일곱 잔 부터는 과음이니 더 이상 먹지 말라는 뜻이다.

미국 CNN은 최근 한 프로에서 ‘한국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뛰어난 10가지’ 가운데 폭탄주를 포함시켰다고 한다. 연말을 앞두고 이런 불명예 폭탄음주문화는 좀 바뀌어야 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