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 때 제주목 객주(客主) 김만덕의 선행은 드라마로도 방영된 적이 있다. 그녀는 본래 제주 기생이었으나 기적(妓籍)에서 벗어나 무역을 하여 돈을 번다. 그리고 어느 해 기근이 심각하여 백성들이 굶주리자 전 재산을 기부했다. 거금을 받은 제주목사는 육지에서 쌀 500석을 사들여와 백성들을 살렸다.

만덕의 선행에 감동한 것은 정조임금. 임금은 특별히 궁으로 만덕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치하하며 만덕의 소원을 들었다. 만덕의 소원은 꿈에도 그리는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당시 국법은 제주 여성이 육지에 상륙 금강산을 관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조는 만덕의 갈망을 들어준다.

임금은 만덕에게 내의원 의녀행수(內醫院 醫女行首)라는 직첩도 내렸다. 결혼한 사녀(士女)가 아니고 천역을 면한 기생신분이었기에 이런 직급을 준 것이다. 당대 문호들이 만덕의 미담을 기리는 시를 짓기도 했다. 만덕 스토리는 3백년 전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여성CEO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라 감동이 더 크다.

70년대 청주 서문시장에 해장국을 파는 욕쟁이 할머니가 살았다. 할머니가 밤새 끓여 국물을 낸 해장국은 맛이 좋아 식당은 이른 아침부터 손님들로 북적였다. 해장국집은 주요기관장들의 조찬 모임장소로도 각광을 받았다. 할머니는 큰 솥단지 옆에 앉아 해장국을 푸면서 걸쭉한 욕설을 내뱉기 일 수였다.

이른 새벽 현직지사가 충북을 순시중인 모 장관을 모시고 해장국집을 찾았다. 장관은 먹는 것이 시원찮았다. 이를 본 할머니는 장관한테도 핀잔을 퍼부었다. ‘무슨 영감이 그리 찌적거려...잘 처먹어야 복이 있는 거여’ 장관은 놀라 할머니를 노려보았으나 지사가 황급히 불을 껐다. ’이 할머니는 아무한테나 저럽니다. 이해해주십시오‘

할머니의 이름은 김유례. 29살에 남편과 사별하고 3남매를 키우며 콩나물장수, 해장국집을 운영하여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그런데 79년 8월 어느 날 필자에게 청주약국 국장이었던 곽한봉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모은 전 재산을 충북대학의 장학기금으로 내놓겠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청주약국으로 달려갔다. 할머니는 손님의자에 앉아 기자에게 재산을 기부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자신이 못 배운 한을 젊은 지성인들을 가르쳐 풀고 싶다는 뜻이었다. 재산 기증처를 찾던 중 곽한봉씨에게 자문을 요청한 것이 이 같은 결심을 하게 된 이유라고 했다. 평소 약국을 자주 찾았던 할머니는 어느 누구보다 곽한봉씨를 신뢰했다고 한다.

김유례 할머니는 자신이 쓸 돈과 머무를 곳만을 제외하곤 전 재산을 모두 충북대학에 장학기금으로 기부했다. 현금 5천만원, 건물 15억원에 달했다. 30년전 이 금액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약1백억원 규모라고 한다. 이튿날 할머니의 장학기금 쾌척은 충청일보 사회면 머리기사로 다뤄졌다.

할머니는 지난 1997년 88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충북대는 김유례 할머니의 뜻을 높이 기리기로 했다. 김유례장학회가 설립됐으며 지금도 한해 60명이 넘는 학생들이 혜택을 받고 있다. 총장과 교수, 학생들은 매년 할머니 추석절이면 묘소를 찾아 성묘행사도 거행한다.

고 김유례할머니 이후 청주에서는 충북대에 잇단 장학금기부가 봇물 터지듯 이어졌다. 그것도 할머니들이 주류를 잇는다. 1993년 행상과 노점상을 하며 근근이 살아온 신언임할머니는 청주도심에 있는 시가 33억원 상당의 상가 건물을 희사했다. 또 전정숙할머니는 10억원대의 전 재산을 충북대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얼마 전 팔순의 한 할머니가 충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실을 찾아 1억원의 성금을 기탁했다. 할머니가 직원에게 건넨 하얀 봉투에는 수표 3장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자신을 누구라고 밝히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몇 십만원을 가지고도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살벌한 세상. 아! 우리 청주 할머니들 아니 어머니들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 있다. 평생 호의호식 한번 하지 않고 지악스럽게 아끼면서 모아온 재산이 아닌가. 그래서 이 같은 성금은 더욱 값진 것이라고 하겠다. 이같이 훌륭한 어머니들이 있어 한국은 희망의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