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대 말 기황후(奇皇后)는 옛 우리민족 여성가운데 유일하게 대제국의 황비(皇妃)가 되었다. 몇 명의 여인들이 중국 황제의 후궁이 된 경우는 있지만 정비(正妃)가 되어 천하를 호령한 여인은 기황후뿐이다. 몽골인들은 지금도 기황후를 국모로 섬기며 숭배하는 마음이 지극하다. 이들이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하고 가까운 마음을 갖고 있는 배경에는 기황후의 존재가 빠질 수 없다.

기황후는 과연 어떤 여인이었을까. 필자는 30여년전 충북 진천지역을 답사할 때 이월면 무제봉(武帝峰) 아래의 한 유적을 조사하게 된다. 무제봉은 그 이름만큼이나 주목되는 산이었다. 왜 ‘무제봉’이란 이름을 붙인 것일까.

당시 이월면 촌로들은 무제봉을 김유신 장군과 관련짓기도 하고 어떤 자료는 기황후와 원나라 순제(順帝)와의 인연을 들고 있다. 전자는 김유신장군이 후대에 흥무왕(興武王)이란 시호를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다는 것이고 후자는 기황후의 부군인 순제가 한때 대청도에 귀양을 왔을 때 그녀와 만나 사랑을 나눴다는 설화에 기인하고 있다.

기황후가 태어났다는 ‘궁골(宮洞)’ 유적을 조사한 결과 여러 점의 고려 말 유물이 채집되었다. 청자파편과 큰 건물의 잔해인 와편이 즐비 했다. 필자는 기황후의 출생지에 관해서는 행주설, 연천설이 있으나 지금까지는 궁골이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한다.

기황후는 몽골이 고려를 항복시킨 후 공녀(貢女) 요구로 끌려간 여인이다.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정사에 기록돼 있는 것만도 80년간 50여회나 된다. 공녀는 유목민족 출신인 원나라 왕실에 여자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원 세조 쿠빌라이는 한족보다 고려인들의 우수성과 재능을 더 높이 사 고려여인들을 요구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인은 한족보다 기예가 우수하고 시부(詩賦)만 공부하는 이들보다 경학(經學)에도 조예가 깊다”

공녀는 당시 고려에게는 충격적이고 가장 비극적인 일이었다. 사대부 집안에서는 딸 낳는 것을 숨겼으며 일찍 시집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또 원나라에 끌려가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까지 있었다.

기황후는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기자오는 문하시랑평장사를 한 기윤숙(奇允肅)의 증손이며 그 후광으로 관직에 오른 인물이다. 기황후는 공녀로 뽑혀 북경에 간 이후 1333년 고려 출신 환관이던 고용보(高龍普)의 주선으로 궁녀가 되었다고 돼있다.

원사의 기록을 보면 고용보는 기황후를 차 따르는 궁녀 자리에 앉히고 순제의 눈에 들게 했다고 한다. 순제는 어린 시절 서해 대청도에 1년간 귀양을 온 경험이 있었다. 황제는 차 시중을 드는 기황후를 보고 총애하게 된다.

대만 고궁박물관에 있는 기황후의 영정을 보면 그녀는 몽골여인과 가까운 모습이다. 궁중에 수 없이 많았던 미녀들의 얼굴과는 다른 북방여인에 가깝다. 얼굴이 넓고 둥글며 살이 후덕한 모습이다. 초원의 DNA를 가진 순제가 가녀린 여인만 가득했던 궁중에서 뜻밖에 기황후를 보고 진한 향수를 느낀 것은 아니었는지.

쿠빌라이 말처럼 사대부 집안에서 학문을 한 기황후는 지혜와 총명을 겸비했던 것 같다. 제1황비보다 더 격이 높은 여인이었다. 기황후는 아들을 낳은 후 황제를 원망하며 살고 있는 제1황비 일당을 제거하고 첫째 부인이 되는 기염을 토한다.

배원정책(排元政策)을 추구했던 공민왕과 대항하여 고려인들에겐 비교적 인상이 좋지 않았던 기황후는 오빠인 기철(奇轍)이 참형을 당하고부터는 더욱 악행을 저지른 것으로 고려사는 기록한다. 그러나 자신의 오빠가 죽음을 당했는데 화를 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기황후는 홍건적에 쫓기는 아들 소종(北元)을 시위하며 북경을 떠나 그들의 고향인 초원으로 돌아가 몽골제국의 명맥을 보존한다. 이런 용맹함으로 몽골인들에게는 지금도 국모로 숭앙받고 있는 것이다.

모 방송에서 기황후의 일대기를 담은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기황후를 중국의 여검객으로 그리는 등 역사왜곡에 그저 말문이 막힌다. 드라마라지만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했을 때는 역사적 사실과 시대적 고증을 철저히 살펴야 하지 않을까. 기대했던 진천이 낳은 세기적 여인 기황후의 현대적 부활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