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태조 왕건은 부인이 29명이나 되었다. 1만 명의 궁녀와 수백여 명의 비빈을 거느리고 살았던 중국의 황제 풍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고려 역대 왕으로는 가장 많은 처첩을 거느렸다. 왕건은 각지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호족들의 딸들로부터 시침(侍寢)을 받고 이들을 왕비로 삼았음으로 부인들이 늘어난 것이다.

29명의 왕비 중에서 가장 총애를 받은 여인은 누구였을까. 3번 째 부인인 신명왕후 유씨라고 알려져 있다. 그녀는 중원경 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이었다. 30년 전 동아일보에 연재 된 김성한의 소설 ‘왕건’을 보면 신명왕후 유씨의 만남을 로맨틱하게 엮어내고 있다. 당시 신명왕후는 16세의 어린 소녀로 등장한다.

왕건은 왜 많은 부인들을 외면하고 유씨와 지내는 날이 많았던 것일까. 왕의 총애가 깊었던 것을 보면 유씨는 분명 미인이었거나 총명했을 게다. 신명왕후는 왕건의 부인들 중에서 가장 많은 5남 2녀의 자녀를 낳았다. 그리고 두 명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고 친정에게는 대대로 영화를 누리게 했다. 제3대 왕 정종(定宗), 제4대 왕 광종(光宗)이 유씨의 아들이다.

유씨 소생의 왕 중에서 가장 정치를 잘한 왕은 바로 광종이다. 그는 고려 초기 미완성이던 국가기틀을 확립하고 처음 과거제를 도입한다. 그리고 임금은 어머니 유씨가 세상을 떠나자 외가인 충주에 큰 사찰을 지어 그 명복을 비는 것이다. 충주에 지어진 왕찰의 이름은 숭선사(崇善寺). 왜 임금은 이 같은 이름을 붙였을까. 선(善)은 유가의 사상이다. 공자는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시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을 준다.(爲善者는 天報之以福하고 爲不善者는 天報之以禍)’고 가르친다. 그래서 군자의 덕목을 가르칠 때 ‘선’을 제일로 삼았다.

조선 인조대 포저(浦渚) 조익(趙翼)은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한 인물로 성리학에 뛰어났다. 포저도 ‘선을 행하는 사람은 군자’라고 정의한다. “선을 행하면 군자의 도가 되고 이익을 좇으면 소인의 도가 되는 것이다. 읽는 글은 똑같지만 선에 뜻을 두고서 읽으면 군자가 되는 길이 되고, 이익에 뜻을 두고서 읽으면 소인이 되는 길이 되니, 선비가 뜻을 세우는 것을 어찌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려 초기 사회는 건국에 참여한 권신들의 권력분배가 심했다. 왕권은 약화됐고 조정에는 사리사욕에 물든 관리들만이 즐비했다. 관직은 나눠 먹기식으로 분배됐다. 임금은 이를 개탄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로 한다. 과거제를 제안한 중국인 쌍기를 귀화시켜 특별대우하고 노비안검법을 시행하는 등 개혁을 단행했던 것이다.

숭선사의 창건은 온 나라에 군자의 덕목인 ‘선(善)’ 발양시키기 위함이었는지 모른다. 광종 스스로 군자의 풍모를 실천하며 과거제도의 시행을 통해 덕망 있는 군자를 얻으려는 충정이 숨겨져 있지 않았을까.
숭선사터는 충주 신니면 문숭리에 있다. 절터는 지난 70년대 후반 필자가 충주지역 폐사 조사과정에서 발견하여 학계에 보고한 유적이다. ‘숭선이’라고 불리는 폐사지에서 ‘숭선사(崇善寺)’라고 찍힌 명문기와 조각을 찾음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이 절터는 후에 국가 중요문화유적(사적 제445호)으로 지정된 바 있다.

숭선사터는 충청대학 박물관의 몇 번에 걸친 발굴을 통해 고려 초기 왕찰(王刹)의 면모가 소상히 드러났다. 얼마 전에는 지금까지 발견 된 유물가운데 가장 큰 금동 풍탁(風鐸)이 찾아져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찬란한 풍탁을 매단 당시 숭선사의 건물들은 얼마나 크고 화려했을까.

풍탁은 풍경(風磬)이라고도 불리며 사암(寺庵)의 건물이나 혹은 석탑 처마에 매달아 소리가 나도록 한 장엄구(莊嚴具)다. 풍탁의 방울에는 물고기 모양의 금속판을 매달고 있는데 잘 때도 눈을 감지 않고 자는 물고기처럼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행자의 나태함과 세상을 일깨우는 경세(警世)의 의미를 담고 있다. 숭선사지에서 찾아진 국보급 풍탁은 오로지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선’이 실종 된 세태를 경고하는 선물인 것 같아 와 닿는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