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에 살면서도 한 달 동안을 만나지 못한 1학년짜리 외손녀에게 전화를 했다. ‘독서 중입니다. 할아버지 방해하지 마십시오.’ 유달리 책읽기를 좋아하여 주말이면 엄마 아빠와도서관 출입을 즐긴다. 바야흐로 독서의 계절이다

올 가을도 예외없이 독서에 대한 현수막은 여기저기 나붙고 눈에 띄는 행사로 봇물을 이룬다. 나이가 불어남은 아무도 막지 못하지만, 정신을 젊게 유지하는 건 누구에게나 선택의 자유다.

독서는 원래 계절이나 연령, 성별, 직업까지 건너 뛴 평생 양식 아니던가. 등잔불 밑에서 책을 읽을 때, 발기발기 헤진 소설책이나 명랑만화 몇권 마을에 들어오면 횡재한 마음으로 밤새우던 기억은 생각할수록 풍요로운 세상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한사람이 흥을 돋워 실감있게 낭독을 하면 사랑방에 가득 모인 사람들 눈은 시각이 야심할수록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읽어가는 글 문단에 따라 울고 웃고 가끔은 무서워하면서도 또 다음날이 오길 손꼽았다.

◇ 평생 양식인데

실시간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인터넷은 신문마저 위협할 정도로 그 세를 키워왔다. 이미 종이 백과사전을 서점에서 몰아냈고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양질의 정보를 쉽고 편안하게 얻을 수 있다. 즐겁고 재미있으니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야말로 손가락 독서 아닌가? 주자(朱子)의 독서비결은 ‘마음으로 읽는 것’을 으뜸으로 여겼다. 요즘 아이들 독서에 음악 감상과 율동까지 겸하는 걸 보면, 아마 글을 읽는 방법도 시대 따라 유행 타는 모양이다.

씁쓸하지만 책읽기 으뜸으로 일본인을 꼽는다. 그들의 독서습관은 결국 의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로 자리 잡았다. 민(民)과 관(官)이 호흡을 잘 일궈 ‘독서하는 일본’이란 국격의 타이틀을 따낸 것으로 파악된다. 청일전쟁 후, 그들은 독서에 대한 열기가 대단했다. 정부가 앞장서 ‘읽는 습관’을 자리 잡게 했고 그 결과 전국에 공공도서관이 설립돼 이용자가 놀랄 정도로 부쩍 늘었다고 한다.

책과 가까이 한 사람일수록 물이 없어도 목마르지 않고 이야기가 샘처럼 솟는다. 다행스러운 건, 입학 전 아이들의 도서관 행 숫자가 점점 늘고 있다는 통계다. 학교와 지역사회 도서관(실)이 첨단화되고 비치된 장서 역시 비교적 풍부한 편이어서 마음만 먹으면 장소와 시간 구애받지 않고 얼마든지 읽을거리와 만날 수 있다. 이제 독서문화도 당연히 바뀌어야할 때다.

책을 읽은 뒤 규정처럼 따라 붙는 ‘독서감상문 쓰기’라든지 ‘ 1인 몇 권 읽기’ 등의 압박적 구호가 오히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의 독서에 대한 짐은 아닐까? 독서축제에 ‘시 함께 낭송하기’와 ‘옛 사랑방 책읽기 재현’ 등을 창의성 있게 포괄해 책과 한 발짝 가까울 수 있는 생활 속의 문화로 수정함도 괜찮을성 싶다. 진학률 높은 학군행 철새가 아니라, 도서관 좋은 인근으로 전학한 사례는 이 가을에도 희망 사항 같아 씁쓸하다.

금세 겨울이 오면 독서식량이 모자라 텅빈머리로 어떤 짝퉁 럭셔리를 연출할지 그게 더 궁금하다. ‘엄마 뭐하세요?’ 아이가 묻고 대답한다.  ‘또 연속극이야’ 부모와 함께 도서관을 드나든 기억이 먼 훗날 내면의 가르침이 된다는 사실 앞에 한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최소한의 자화상은 알아서 그려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