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기억조차 무뎌지면 어쩌나 /작은 울림이라도 전합니다. /침묵을 사랑하고 평생 자식의 무대를 꼼꼼히 준비하신 어머니 /하늘이 먼저 낮아지니 머리를 떠났던 생각들 자리로 옮겨앉고 /가을 달 쯤 뜨겁게 느끼고 싶습니다.’ 필자의 시 ‘어머니’의 일부다.

지독했던 더위와 기습적인 국적불명의 태풍을 이겨내고 풍년 들판으로 채색되고 있을 고향은 생각만 해도 설렌다. 누가 만든 명절인지 어머니 손끝에서 뜬 청국장 냄새까지 솔솔 코 끝을 유혹한다. 내겐 아버지와 어머니 제삿 날짜가 채 한 달 사이도 안된다. 고등학교 3학년, 입시준비로 한창 정독반을 달굴 때 이승을 등뒤로 하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언제나 풍부하셨던 유머부터 떠올리게 된다.

60년대 후반은 대부분 궁핍하여 끼니라고 해야 ‘아침밥 저녁죽’ 이었으며 점심같은 건 아예 엄두도 못냈다. 슬하에 8남매를 두신 부모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제사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추석명절은 차례와 성묘를 하며 막혔던 이야기와 가풍을 익히게 하셨다. 다섯 째 아들인 내가 읍내 중학교 입학시험 결과를 알리는 방이 붙던 날은 합격번호를 나보다 먼저 찾아내시고 당신의 따스한 등에 업은 채 세상을 다 얻으신 양 펄쩍펄쩍 뛰셨다. 3년이 지난 뒤 다시 고등학교에 합격했을 때는 반대로 내가 아버지를 처음 업어 보았다. 아버진 생각보다 너무 가벼우셨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부터 나쁜 병이란 놈이 자라기 시작했을 거라는 때늦은 안타까움에 싸인다. 그 후 혼자되신 어머니는 외로운 기색도 모두 묻어 두신 채 나머지 자식들 일을 감당 하셨다. ‘내 젤로 기쁜 날이 언젠 줄 알아? 우리 팔남매 한자리서 웃는 거여.’ 생전 어머니 말씀이 살아난다.

◇ 제대로 된 만남

1970년 봄, 애송이 청년으로 출발한 가르침의 행보가 한 시대로 흘러 다져온 돌계단처럼 긴 여정을 2013년 여름과 함께 정년으로 여몄다. 어려웠던 고난과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2세 교육을 위해 교육자와 교육행정가로서의 자욱이야 말로 값진 인생이었다. 교직 명찰을 뗀 뒤 맞은 첫 명절이니 부모님에 대한 감회 역시 남다르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내외분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평생 말다툼 한번 없는 사랑으로 꾸려 가섰다. 손수 빚은 누룩을 깔아 동동주를 떠 아버지 밥상에 반주로 올리시던 어머니. 맏이에서 막내까지 순차적으로 여덟이서 벌린 손을 생각해 보면 금고조차 바닥났을 일이다. 겨우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죽는 소리가 멎을 날 없는 우리 내외 앞에 이제야 아버지 어머니의 남다른 손길을 남루한 모자이크로 그려낸다. 추석 전날이면 팔남매는 보름달처럼 빙둘러 앉아 송편을 빚었다. 크기와 모양도 제각각이어서 솔잎을 깔아 쪄낸 뒤 웃음은 명절내내 이어졌다. 부모님에 대한 공간은 무한의 은혜로 살아 수시 드나든다. 생각할수록 자애로움이 가슴 가득 젖냄새로 자욱함을 어쩌랴.

이번 명절은 앞 뒤 날짜를 헤아려 보니 꽤나 긴 연휴다. 제삿상에 절이나 꾸벅하고 온갖 핑계로 자동차 엔진부터 켜는 어리석음의 반복을 깨야겠다. 진정한 교육이야말로 자녀들과 바른 삶의 동행 아니던가?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그대로인 것 ‘피는 물보다 진함’ 아닌가? 부모·형제간, 고부간 혈액을 정화할 소통 역시 ‘제대로 된 만남’이 전제될 때 뻥 뚫리기 때문이다. 봄, 여름, 가을 세 계절 그토록 땀 배어 빚어놓은 열매가 여러 날부터 자식몫으로 챙겨져 추석을 애절하게 손꼽는 우리네 부모님들께 눈부신 추석 햇살을 선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