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민족의 의성(醫聖)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허준(許浚, 1539년~1615년)이 사후 398년만인 금년 신춘에 5번째로 부활했다. 지난 3월 18일부터 MBC TV 드라마 ‘구암 허준’이 역대 드라마, 영화를 통틀어 다섯 번째로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허준의 일대기를 다룬 영상 작품은 1975년 이은성 극본의 일일드라마 ‘집념’(143부작), 1976년 이순재 주연의 영화 ‘집념’, 1991년 ‘동의보감’(14부작), 1999년 특별기획드라마 ‘허준’(64부작)에 이어 2013년 ‘구암 허준’(120부작)이 국민들의 가슴으로 다가서고 있다.

그중에서 전광열이 허준 역을 열연한 14년 전의 ‘허준’은 가히 국민드라마로 사랑을 받아 63%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은 기록했다. 허준이 이처럼 자주 TV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는 것은 허준이란 인물이 우리 한민족에 있어서는 ‘구원(久遠)의 한의상(韓醫像)’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준 작품은 흥행불패의 담보로 여겨져 왔다.

이번 ‘구암 허준’ 드라마의 허준역은 1975년 MBC 일일드라마 ‘집념’에서 처음으로 허준 역을 맡았던 고 김무생의 아들 김주혁이 맡아 열연함으로써 부자(父子)가 허준과 인연을 맺은 이채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혼신을 다해 연기했던 아비의 수준에 아들이 얼마나 접근할 지는 두고 볼 일이나 아직은 초장이라 그런지 감흥의 물결이 잔잔하다는 평이다.

그러면 허준은 누구인가. 경기도 양천면 파릉리(지금의 서울시 강서구 등촌2동 능안마을)에서 태어난 허준은 자는 청원(淸源)·호는 구암(龜巖)으로 할아버지는 경상우수사를 지낸 허곤(許琨), 아버지는 무관으로 종성부사와 용천부사를 역임한 허론(許論)이다. 어머니는 허론의 첩인 영광 김씨로, 허준은 양반가의 서자였다.

비록 서출(庶出)이었지만 양반가의 후예로 좋은 교육을 받은 허준은 어려서부터 사서와 경전 등을 탐독했다. 당시 허준이 성장기에 어떤 계기로 의학의 길에 들어섰는지는(픽션이 가미된 드라마와는 달리) 옛 문헌상 명백히 나와 있지 않다.

‘양천 허씨 세보’에 의하면 허준은 1574년(선조7년) 의과에 급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의 문신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 의하면 1569년(선조2년)이조판서 홍담에게 내의원에 천거를 부탁, 1573년 (선조6년)에 정3품 내의원정에 올랐다는 기록으로 보아 1569년 이후 내의원에 몸담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15년이면 허준 별세 400년이 되는 이 시점에서도 우리가 존경스런 심정으로 허준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치열하게 살았던 의원(醫員)으로서의 그의 생애와 의학적 업적 등이 발하고 있는 영원한 광휘(光輝)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의 한의학계에서는 ‘허준 같은 의원’을 찾아볼 수 없기에 더욱 그의 존재를 목말라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치병제중(治病濟衆)의 의술은 실종 됐는가

허준은 양반 주도사회에서 첩 소생이란 신분상의 불리함과 의업 종사자로서의 중인 처지를 극복했다. 그는 내의원 입직 후 내의·태의·어의로서 선조와 광해군 등의 치료를 통해 의원으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 전란을 겪으면서도 왕을 끝까지 보필하고 동의보감을 저술한 공으로 1606년 정월에 양평군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가자(加資:정삼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 또는 그런 품계를 올리는 일) 받았다.(중인 신분으로 과하다며 사간원 사헌부 등의 반대로 가자가 보류됐다가 그의 사후 추증됨)

허준이 민초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은 파격적인 신분상승 보다 병을 다스려 세상을 구한다는 치병제중(治病濟衆)의 삶의 자세에 있다. 내의원 생활 전 후 질병에서 고통 받는 가난한 백성들을 내 몸 같이 진료해 주며 땀을 흘린 그의 자세는 오늘의 의사, 한의사들이 본받아야 할 의원상이 라 할 것이다.

그러나 허준의 위대함은 14년에 걸쳐 저술한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있다 하겠다. 임진왜란 중 전염병에 고통을 받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의서를 만들라는 선조의 명을 받아 당초에는 태의 허준 등 6명이 찬집에 착수했다. 그러나 정유재란으로 그 작업이 중단됐다가 1597년 왜란 종식 후 허준의 단독 집필로 1610년 완성된 동의보감은 총 25권25책으로, 당시 국내 의서인 ‘의방유취’, ‘향약집대성’, ‘의림요찰’과 중국 의서 86종을 참고하여 편찬했다. 그 내용은 내경(內景)·외형(外形)·잡병(雜病)·탕액(湯液)·침구(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된 동양의학 백과전서로 일본과 중국에까지 그 성가를 떨쳤다.

동의보감은 현재에도 한방임상의학서로 애용되고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1085호)로 지정했고, 국제적으로도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 2009년 7월31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현재 유네스코에 등재된 193점의 기록 유산 중 의학 서적은 동의보감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동의보감의 탁월한 의학적 내용과 세계 최초로 발간된 공중 보건안내서로서의 가치가 단연 빛나고 있다 하겠다.

허준은 이 밖에도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 등 여러 의서를 저술, 한의학 발전에 기여했다. 이런 허준을 우리 민족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고 현대에도 허준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가 방영될 때마다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허준의 후예인 오늘의 한의학계와 한의사들에 대한 국민들의 호감도는 영 딴판이니 어찌된 일인가. 백성의 병을 고쳐 세상을 구하려 했던 조선 명의(名醫)들이 요즘 한의(韓醫)들을 보면 어떤 걱정을 할까. 명리에 너무 빠져 인술(仁術)이 실종된 세태를 장탄식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