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에 오를 만큼 올랐고 재물을 모을 만큼 모았으면서도 권익추구에 한도 끝도 없이 몸을 던지고 있는 게 우리나라의 고위 공직계 풍토라고 한다면 지나친 폄훼일까.

힘없는 서민들 앞에서는 큰소리치던 선량과 큰 벼슬아치들이 최고 권력자 면전에서는 ‘레이저 눈빛’에 얼어붙어 벙어리가 되고 있는 게 우리의 정치풍속도라면 너무 야유한다고 할까.

충청지역 장삼이사(張三李四)의 한 존재라서 안목이 단견해서인지 몰라도 요즘 통치권이 교체된 한국 정치권 풍경은, 굴욕을 당하면서도 높은 자리에 죽기 살기로 연연하고, 입이 있어도 출세에 지장을 받을까 두려워 입에 자물쇠를 스스로 채우는 비굴한 사람이 넘쳐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남산골 샌님’인 ‘딸깍발이’를 그리워한다. 조선시대 비록 남산골 선비가 가난하여 마른 날에도 나막신을 신어 딸깍딸깍 소리를 낸다고 ‘딸깍발이’란 낮잡은 소리를 듣는 신세였지만, 그는 가난하면서도 자존심과 지조를 중시여긴 ‘시대의 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명했던 국어학자 이희승(1896~1989)은 그의 수필 ‘딸깍발이’에서 그들의 몇 가지 신조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사실로 졌지만 안 졌다는 앙큼한 자존심, 꼬장꼬장한 고지식,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짚불)은 쬐지 않는다는 지조…(아무리 궁하거나 다급한 경우라도 체면을 깎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적잖은 율사(律士)출신들이 출세에 급급해 온갖 추태를 보이고 있는 세태 속에서 ‘청백리’로 불리운 김능환(金能煥)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지난 5일 퇴임, 33년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이날 퇴임식을 가진 김 위원장은 200여명의 직원들과 악수를 나눈 후 청사 바깥에 세워둔 자가용을 운전, 청사를 떠났다.

법조계에서는 김능환 전 선관위장에게 ‘청백리’란 별칭을 붙였지만 그의 올곧았고 청렴했던 법관 자세를 생각한다면 ‘진천산(産) 딸깍발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물욕은 물론 관직에도 욕심을 자제, 귀거래사를 불렀다고 보기 때문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전 대법관 부부

▲ 김능환 전 대법관

주지하다시피 김능환(이하 관칭 생략)은 1951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경기고, 서울대를 졸업한 그는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 육군 법무관을 시발로 법조계에 입문한 후 전주지법 판사·청주지법 충주지원장(1992~1994)·대법관(2006)·제17대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사법시험 동기인 김능환은 2006년 대법관 청문회 때 “퇴임 후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동네에 책방 하나 내고 이웃 사람들에게 무료 법률상담을 해주면서 살고 싶다”고 밝혔었다. 그리고 선관위장 퇴임식 날 자신의 향후 거취에 대해 “아내의 가게를 도우며 소시민으로 살아갈 것이고, 당분간 공직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대법관 퇴임 당시 재산이 2억 원으로 알려져 청빈한 법관으로 평가됐고, 몸담기만 하면 수십억 원의 수입이 보장되는 로펌행을 거절했다. 그리고 올해 초 박근혜 정부의 초대 총리로 거론되자 “대법관에 이어 역시 헌법기관인 선관위장을 맡았던 사람이 행정부를 총괄하는 공직을 맡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고사했다. 일인지하만인지상(국무총리)의 자리에 미련이 없음을 선언, 신선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김능환은 공금의 엄중함과 부하 직원에 대한 애정 어린 일화도 남겼다. 그는 선관위장 퇴임 직전 임직원들에게 “세금이 들어가는 만큼 퇴임식을 위한 공로패를 만들지 말라”고 지시했다. 한편 그는 재작년 10월 재보선 때 선관위 홈페이지에 대한 디도스 공격 후 선관위 직원이 직무유기죄로 기소되자 남모르게 변호사 선임비용 800만원을 사비로 지원했다.

이같은 김능환에 부창부수(夫唱婦隨)라, 그의 아내 김문경(58)씨는 공직에 있는 남편의 청렴결백한 자세에 호응,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남편이 대법관 자리에서 물러나자 퇴직금으로 채소가게를 열었다. 김능환은 이런 아내를 도우며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겠단다.

김능환의 33년 공직생활 좌우명은 중용에 나오는 ‘불성무물(不誠無物)’. 성심을 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물욕과 권력욕이 넘쳐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깨끗한 공직자상을 보이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진천의 자랑스러운 아들’ 김능환 전 대법관 부부에게 아낌없는 격려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