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정골 산길을 걷다. 아직도 꽝꽝 길은 얼어 딱딱하다. 이 길은 나 만의 유일한 산책길이며 명상의 길이다. 이 길을 걷노라면 나를 이끄어가고 나를 보듬어 주는 위로와 안식의 길이다. 휴일이면 5년동안 이 길을 걸었으니 너무나 익숙하고 어머니 품 속 같은 길이다. 한 겨울철은 동면한 야생동물처럼 나도 이 길을 걷는 것을 잠시 멈추긴 했다.

새소리가 들리고 운 좋은 날이면 고라니같은 야생동물도 만나게 되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올 겨울은 춥고 눈이 많이 내렸으니 그들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먹으며, 어떻게 지낼까? 걱정 아닌 걱정이 된다. 들풀도 입히시고 새들도 먹히시는 천부께서 그들을 돌보시리라는 믿음 밖에 없다.

보이는 야산 등성이에는 노인의 머리처럼 듬성듬성 아직도 흰눈이 그대로 남아있다. 음지에는 하얀 눈이 녹지 않은 채 내렸던 그대로 좀 딱딱하게 굳어있긴 하지만 아직도 겨울임을 실감한다. 아마 이 눈이 올 겨울에 마지막 밟을 눈이 아닌가 생각되어 일부러 눈을 밟으면서 걸었다. 하얀 눈길을 걷노라면 또 다른 동심의 세계를 나를 이끌게 하여 나를 추억의 세게로 여행하게하는 마력이 있다.

하늘은 해가 뜨긴 했지만 구름이 가리워서 태양은 볼 수가 없다. 이 구름이 걷히면 강렬한 태양이 단번에 내가 걷고 있는 꽝꽝 언 호절골 길도 녹여 줄테지. 인생의 나그네 길에서도 구름이 덮힌 오늘같은 날을 맞이 할 때가 많다. 고난과 고통이 직면하면 이 고난과 고통의 내면에는 태양이 있음을 보지 못하고 절망하고 좌절하여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잠깐 구름이 인생의 길에 있을지라도 다시 태양이 모두를 환하게 비출일 것을 알면 좋을 텐데... 괴테는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낼수 있다."라고 했다. 고통없는 인생이 누가 있으랴? 삶의 바닥은 염전이라고 하지 않는가?

색채는 빛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많지 않다. 고통을 능히 이긴 자는 그 누구보다도 무지개처럼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어깨 너머로 보면 그들은 모든 것이 행복과 기쁨의 길인 듯이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그들을 보면 그들도 나와 꼭 같은 길을 걷고 있으리라. 모든 사람은 전쟁터와 같은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행복한 자는 단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뿐이다. Attitude is everything.!(태도가 모든 것이다.)

계절은 어김없이 때가 되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오늘 만일 내가 인생의 겨울을 맞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인생의 봄도 오리라. "이 세상은 영원한 기쁨도 없고, 영원한 슬픔도 없다." 라는 '냉정과 열정 사이'의 작가 쓰지 히토나리가 쓴 연애소설 한 대목이 생각난다.

산길도 얼어있고 아직도 음지에는 눈이 그대로 있지만 산 위에 양지바른 곳에서 햇빛을 받아 얼음이 녹고 눈이 녹아서 쫄쫄 산길따라 개울물이 흘러간다. 흐르는 물소리가 너무나 맑고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것 같아 자연의 스승을 만나서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오늘 걸은 호정골산길. 나 만의 데이트라 오래 오래 간직하고 싶다. 청아한 개울 물소리에 구상 시인의 '오늘'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산길 걷는 동안 버들개지 나무에 벌써 희디흰 봉우리 맺힌 봄의 전령사를 만나 한 줄기를 꺽어왔다. 꽃병에 꽂아두고 버들개지 흰 봉우리에서 곧 뽀송뽀송 꽃 피울 봄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