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신라는 두드러진 모계사회였다. 사내아이는 어머니의 성분에 따라 평생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아버지가 왕족이라 해도 어머니가 평민이면 아이는 육두품이상의 벼슬에 나서지 못했다. 아버지의 신분이 보잘 것 없어도 귀족의 여인을 만나면 신분이 달라진다.

원효스님과 요석공주의 러브스토리로 태어난 설총은 궁중에서 태어나 훗날 대 문호로 자라게 된다. 스님의 집안은 경주 육부 호민이긴 했어도 진골의 성분을 갖지 못했던 모양이다. 설총이 큰 학자로 성장한 것은 뒤에 방랑만 일삼는 스님보다는 든든한 요석공주의 후광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게다.

김유신장군의 어머니는 갈문왕 입종의 딸 만명부인이다. 진천 만노군 태수의 아들이었던 김유신은 15세에 서라벌로 갔다. 그가 출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바로 진평왕의 어머니이자 외할머니인 만호부인(萬呼夫人)때문이었다. 만호부인은 당시 신라국의 실질적 권력자이자 대모였다. 김유신의 어머니가 왕족이 아니었으면 이 같은 출세는 어려웠을 것이다.

신라 개국 초 임금들은 무당의 지위였다고 한다. 하늘의 제사장도 모두 여인들이 맡았다. 고 기록을 보면 차차웅이란 칭호는 여자 무당한테만 붙이는 '무'의 신라 방언이라고 했다. 흥미롭게도 박혁거세나 남해차차웅, 그 뒤를 이은 유리왕까지 모두 여제사장을 겸한 여자 임금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 같은 모계사회 여제사장의 전통은 북방민족의 유풍이다. 문무왕 자신도 자신들의 선조를 흉노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한 것은 이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덕, 진덕, 진성을 여왕으로 모신 것도 이 같은 모계사회였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신라여인들은 지금우리가 생각하는 연약한 여성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쟁 시 전사가 되고 성을 쌓을 때면 노역에 종사하는 강한 여성들이었다. 진흥왕대 초기 본래 화랑의 전신은 여성으로 원화(源花)라는 이름을 붙였다. 남자 이상으로 기마나 검무에 출중한 여성들이었던 것이다.

고려에서 공녀로 바쳐진 진천의 아리따운 아가씨 기씨(奇氏)는 대원제국의 황비가 되어 천하를 움직인 장본인이다. 주원장의 명군에 밀리면서 기울어져가는 황실을 이끌고 몽고의 고토로 황도를 옮겨 몽골제국을 지탱하는 괴력을 발휘한 것이다. 모계사회 전통의 DNA가 작동한 것인가.

과거 조선유교사회도 ‘남자는 하늘’이라 하여 부계사회인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모계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조선시대의 대왕대비는 왕실의 최고어른으로 강력한 우먼파워의 상징이었다. 왕이 갑자기 붕어했을 때는 후계자 지명권을 가졌다. 왕이 어리면 수렴청정(垂簾聽政)하여 실제적인 군주로 군림했다. 성종 대 폐비 윤씨를 사사케 한 인수대비, 조선 말 세도정치의 배후 신정왕후 조대비는 그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남자의 신분이 장관급에 이르면 여성도 이에 준하는 지위를 받는다. 남자가 가선대부(嘉善大夫.정2품) 직첩을 받으면 그 부인은 임금으로부터 정부인(貞夫人) 위호(位號) 받았던 것이다. 사대부는 자신의 아내일지라도 반드시 존칭을 썼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처가살이를 하는 선비들이 많았다. 조선의 거유 송시열도 어머니 현풍 곽씨의 고향 옥천 이원에서 태어났다. 모친이 해산달에 맞춰 한밭 송촌에서 친정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종(中宗)대 명현으로 존경 받았던 병암(屛巖) 구수복(具壽福)도 한때 벼슬을 잃자 본가가 아닌 보은 속리산 마로에서 처가살이를 한다. 당대에도 모계의 영향이 상당히 컸던 것이다.

최근 한 리서치 회사가 직장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0%가 여성 중심으로 직장, 가정생활이 이뤄지는 이른바 ‘신(新)모계사회’가 도래하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집안 모임이 주로 처가위주로 이뤄진다’는 응답이 ‘친가위주로 이뤄진다’는 응답보다 많았다는 것이다.

모계사회의 유풍은 한국의 새 대통령에 여성을 선택했다. 박근혜 당선자는 국민대통합을 화두로 들고 나왔다. 새 대통령은 어머니 같은 자애로운 풍모로 민족의 화해는 물론 한국이 처한 여러 가지 어려운 난제들을 해결하는 역량을 발휘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