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선거전에 불이 붙으면서 충청도가 몇 년 만에 화끈한 불 맛을 보고 있다. 여 야 후보 공히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매달리는 이유는 단 하나, 선거의 승패를 가를 캐스팅보트의 역할을 어수룩한 충청도가 맡고 있어서다.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는 의회에서 가부(可否)가 동수일 경우 의장이 갖는 결정권이다. 공교롭게도 이처럼 결정이 어려운 상황일 때, 이를 부결로 처리하거나 의장이 캐스팅보트를 행사하여 한쪽의 손을 들어 주게 되는데 우리나라 국회에서는 부결로 처리하고 있다.

의장이 표결에서 갖는 권리는 그 합의체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 법률상으로는 의장이 어느 편에 표를 던지든 자유겠지만, 운영상 의장은 현상유지를 위해 부(否)표를 던지게 되는데 이런 식으로 의장이 행사하는 권한이 '캐스팅 보트'다.

두 당파의 세력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대세를 좌우할 열쇠를 쥔 제3당의 표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캐스팅 보트란 말을 쓴다. 15대 대선에서 김종필이 자민련의 힘을 몰아 김대중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 바로 '캐스팅 보트'다.

15대 대선 후, 김대중 선생의 고향 언저리에 볼 일이 있어 갔더니 충청도 번호판을 확인한 주민들이 극진한 대접을 하더라는 자랑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충청도가 김대중 정부로부터 얻은 혜택은 몰아준 표에 비해 보잘 것이 없었다.

16대, 17대 대선 역시 충청권 표심의 향방이 대권을 결정했다. 이토록 중요한 충청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지금 두 후보는 어느 때 보다도 사력을 쏟고 있다. 하여, 이번 선거전에 중원의 혈전이란 별칭이 붙게 됐다. ‘중원을 제패하는 자가 천하를 지배하리라’ 깃발만 펄럭이지 않을 뿐, 날이 선 혀와 불이 이는 눈빛은 무림의 혈전을 방불케 한다.

안색을 쉽게 바꾸지 않아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충청도의 마음을 얻기 위해 두 후보는 원하는 대로 다 퍼주겠다는 공약을 토하고 있다. 일예로, 정부가 지자체 일부 부담을 요구하여 논란이 돼왔던 과학벨트 부지매입비 부담 문제에 대해서 박 후보는 "과학벨트 부지매입비를 국가에서 선지원해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 했고, 문 후보는 "국가에서 전액 부담해 원래 취지대로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뒷간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른 것처럼

선지원과 전액부담이란 시원시원한 호언에 귀가 즐겁긴 하다. 그러나 우선 표심을 잡고보자는 식의 차별성 없는 공약에 실소가 새나온다.

교육과학기술부가 과학벨트 부지 매입의 시급성을 이유로 부지매입비 700억 원을 요구했지만 기획재정부가 단 한 푼도 배정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이 불과 두어 달 전이었다. 내년 예산에서 완전히 배제했던 과학벨트 부지 매입비를 서로 다투며 내주겠다니 이게 무슨 꿍꿍인가 싶은 것이다.

한두 번 우롱당한 처지가 아닌지라 의심부터 들게 된 것이 충청도의 서글픈 정서다. 그렇다고 해서 의심이나 불만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우리끼리야 익숙한 일이니 전혀 불편하거나 답답할 일이 없지만 확답을 받고 싶은 입장에선 미치고 환장할 지경일 것이다.

충청도식 표현 중에 “저는 걱정마세유”가 있는데 자기 식대로의 해석이 가능한 최고의 대꾸라고 본다. ‘제 맘은 이미 그 쪽’이라는 의미로 알아듣고 흐뭇해 할 수 있지만 ‘딴 데 가서 알아보라’는 거절의 뜻이 숨어 있음을 짐작이나 할까.

누구에게라도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구사하는 어눌한 화법을 믿고 이미 제 편에 엎어졌다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우리의 속이 여문 밤처럼 단단해져 있음을 대선 후보들을 알고 덤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