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하러 왔어 나 죽는 꼴 보러 온거여’ /할아버지 버럭 화내시고 사랑방으로 나가셨다 /‘밑빠진 독에 물붇기 아니니?’ / 다시 안 온다며 차례가 끝나기 전, 삼촌이 떠나셨다 /‘누군 배 터져 죽는 줄 아나 봐’ /엄마는 맏 며느리 된걸 후회하나 보다 /나도 큰 아들인데...  필자의 시 ‘억울해’ 전문이다.

추석은 추썩추썩 다가온다더니 옛말 틀린게 하나없다. 유난했던 찜통 더위와 기습적으로 강타한 국적불명의 태풍도 언제 그랬느냐 싶게 말쑥한 한가위 들판되어 객지의 피붙이가 고향을 포옹한다. 벌초에 나선 자손들 정성도 남달랐다. 햇밤송이 마중으로 가을 세상은 온통 구수하다.

여러 해 전부터 부모님을 산소에서나 뵈어야 하는 아릿함은 이번 명절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제삿 날짜가 채 한 달 사이도 안된다. 고등학교 3학년, 대입준비로 한창 정독반에 묻혀있을 때 이승을 등뒤로 하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싸하다.

슬하에 8남매를 두신 부모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제사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추석명절은 차례와 성묘를 하며 소통과 가풍을 가르치셨다. 다섯 째 아들인 내가 읍내중학교 입학시험 결과를 알리는 방이 붙던 날은 합격번호를 나보다 먼저 찾아내시고 당신의 따스한 등에 업은 채 세상을 다 얻으신 양 표정까지 최고셨다. 3년이 지난 뒤 다시 고등학교에 합격했을 때는 반대로 아버지를 처음 업어 보았다. 아버진 생각보다 너무 가벼우셨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부터 몹쓸 병이란 놈이 자라기 시작했을 거라는 안타까움을 이제야 읽는다. 그 후 혼자되신 어머닌 외로운 기색 한 번 못한 채 나머지 자식을 감당 하셨다. ‘내 젤로 기쁜 날이 언젠 줄 알아. 우리 팔남매 한자리 서 웃는 모습이여.’ 생전 어머니 말씀이 살아난다.

◇ 우 애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내외분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평생 말다툼 한번 없는 무풍의 삶으로 꾸리셨다. 손수 빚은 누룩을 깔아 동동주를 떠내어 아버지 밥상에 반주로 올리시던 어머니. 맏이에서 막내까지 순차적으로 여덟이서 벌린 손을 생각해 보면 금고조차 바닥났을 일이다. 추석 전날이면 팔남매는 보름달처럼 빙둘러 앉아 송편을 빚었다. 크기와 모양도 제각각이어서 솔잎을 깔아 쪄낸 뒤 품평회가 명절내내 웃음으로 번졌다. 아무런 막힘없는 부모님에 대한 공간은 무한의 은혜로 살아 수시 드나들게 된다. 생각할수록 자애로운 평화가 자리하여 가슴 가득 아련한 젖냄새가 묻어남을 어쩌랴.

겨우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죽는 소리 멎을 날 없는 우리 내외 앞에 이제야 아버지 어머니의 남다른 사랑을 남루한 모자이크로 그려낸다. 우리네 부모님들은 공통적으로 남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봄, 여름, 가을 세 계절 그토록 열약한 환경에서 가꿔온 먹을거리를 자식몫으로 챙겨 추석 오기만을 손꼽았으니 말이다.

이번 명절도 우울한 얘기 먼저 들려온다. 부모님 앞에서 네 것 내 것 따지다가 서슴치 않고 막말을 뱉고 제삿상도 물리기 전에 부리나케 나서는 골 깊은 그림. 아니 그것쯤은 약과란 엄청난 사례를 묻어둔 쪽은 차라리 명절무용론까지 볼륨 높인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그대로인 것 ‘피는 물보다 진함’을 꼽는다. 부모 형제간, 고부간 혈액을 맑게 만들 뿌듯함도 바로 명절 빼곤 결코 힘든 일이다. 우애야 말로 가장 솔직한 인성교본임을 잊지 말자.